예상치도 못한 프렌치 악몽
외국계 기업에 지원하는 일은 처음엔 막막했다. 한국에서만 커리어를 쌓아온 나에게, 해외 취업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런데 의외로 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링크드인(Linkedln).
그곳에서 나에게 맞는 헤드헌터 몇 명만 잘 연결된다면, 지원 루트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물론, 수많은 헤드헌터들 중에서 나와 잘 맞는, 믿을 만한 헤드헌터를 찾는 데만 해도 한 편의 이야기가 될 정도다.
여러 곳에 서류를 넣고, 기다림이 익숙해질 무렵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의 인사팀에서 연락이 왔다. 내 이력에 흥미를 느낀 팀원이 면접을 보고 싶다며 가능한 시간을 물었다. 워낙 가고 싶던 회사였기에, 나는 주저 없이 “언제든 좋다”고 답했다.
그때 나는 싱가포르가 아닌 서울에 있었다. 면접은 줌으로 진행됐다. 예정 시간보다 5분 먼저 접속해 긴장된 마음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 화면 속에 정말 영화처럼 생긴 프랑스인이 등장했다. 5분 일찍 접속해 기다리던 내 앞에, 정말 잘생긴 프랑스인이 나타났다.
... 그리고선 지옥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억양의 영어가 이렇게나 어려울 줄은 몰랐다. 브리티시도, 인도식도 나름 경험이 있었지만, 프렌치는 차원이 달랐다. 한 문장 한 문장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워 집중했지만, 지금 영어로 말한건지, 프랑스어로 말한건지 착각할 정도로 대화는 좀처럼 내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 넘게 서로를 알아갔고, 마지막에는 긍정적인 피드백도 받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싱가포르 팀의 보스였다. 보통 면접을 볼 때 라운드가 높아질수록 더 높은 직책의 분이 들어올거라 예상했지만 우리 팀의 경우엔 보스가 팀원들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직접 면접을 통과시킨 후 다음 라운드로 진행이 되었다.
며칠 뒤, 인사팀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다음 라운드 면접 일정이 잡혔다. 이번엔 퀀트 트레이더가 들어왔다. 들어가기 전에 한가지만 바랬다. 제발 프렌치만은 아니기를.. 역시나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흡사 천재 프로그래머 아우라를 풍기는 머리카락보다 수염이 더 긴 프렌치가 나타났다. 다행히도 보스보다는 영어는 알아 듣기가 수월했지만 실무자인 만큼 한 시간 내내 날카로운 질문이 쏟아졌고, 마지막에는 수학 세 문제, 코딩 한 문제까지 풀어야 했다. 면접이 끝나고 노트북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나름 잘 봤다는 생각이 들었고, 일주일 뒤 다시 인사팀에서 연락이 왔다. 3라운드 면접 일정을 잡자는 내용이었다.
이제 겨우 면접 두 번을 치렀을 뿐인데, 나도 모르게 자신감이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줌 화면에 두 명이 동시에 입장했다. 다시 한 번 등에 땀이 맺히는 게 느껴졌다. 이제는 억양만 들어도 프렌치인지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단련됐지만, 다행히 한 명은 프렌치, 한 명은 인도인이었다. 그런데 이 조합이 의외로 유쾌했다. 가끔 내가 프렌치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들으면, 인도인이 중간에서 살짝 통역을 해주는 웃픈 장면도 몇 번 연출됐다.
다대일 면접이라 질문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40분쯤 지나, ‘그래도 이번엔 무난하게 잘 하고 있구나’ 싶던 찰나, 아니나 다를까 남은 20분은 또 테스트 시간이었다. 이번엔 머신러닝. 총 다섯 문제 중 네 개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런데 마지막 문제,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기초적인 질문에서 머릿속이 꼬이기 시작했다. 애써 차분하게 답했지만, 면접이 끝나자마자 구글링을 해보니 오답이었다. 아, 정말 괴로웠다.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되새김질하며 후회만 남았다.
그때부터 매일 아침, 습관처럼 인사팀 메일을 확인했다. 일주일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이제 다른 회사에 집중해야 하나’ 싶던 찰나, 다시금 이메일이 도착했다. 다음 라운드로 가자는 소식이었다. 서류 합격 때보다 더 기뻤다. ‘이제 3라운드까지 끝냈으니, 두 번 정도만 더 보면 오퍼를 받을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나는 무려 총 12 라운드를 거쳤고, 4개월을 그 여정에 쏟아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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