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구하기 그리고 뜻밖의 변수들
1년간의 경업금지 기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참 많은 고민을 했다. 앞으로 싱가포르에 다시 돌아갈 가능성이 크기에, 이 기회에 다른 곳에서 살아보는 건 흔치 않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인이 된 이후로 줄곧 도시에서만 살아왔던 나로선, 이번만큼은 사람이 붐비지 않는 곳, 좀 더 한적하고 여유로운 공간에서 머물고 싶었다. 말레이시아, 베트남, 필리핀 등 다양한 후보지를 고민했지만, 결국 우리가 선택한 곳은 제주도였다.
이유는 명확했다.
첫째, 출산 때문이다. 아내가 둘째를 임신 중이었기에, 보다 익숙한 환경에서 아이를 낳고 싶었다. 외국에서 외국인으로 출산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불편한 점이 많았다. 의료의 질과 비용 또한 고려할 수밖에 없는 요소였다. 제주도는 그런 의미에서 심리적, 현실적으로 가장 안정적인 선택이었다.
둘째, 비용이다. 출산 비용을 포함해 전체적인 생활비가 해외보다 저렴할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다. 특히 같은 비용으로 서울에 사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의 질을 누릴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물론 이 부분은 예상과는 꽤 달랐지만,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좀 더 자세히 풀어보겠다.
마지막은, 친구이다. 대학교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 중 한 명이 제주도에서 홀로 살고 있었다. 외딴섬에서 말동무가 있다는 건 나에게 큰 장점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그는 전업 주식 투자자라, 매번 만나서 투자 얘기를 하다보면 지루할 틈 없는 시간을 보내곤 한다.
시간이 넉넉치 않아 집은 하루 만에 보고 결정해야 했다. 싱가포르에서 바로 제주도로 향했는데, 직항이 꽤 많다는 사실에 약간 놀랐다. 오전 비행기로 도착한 뒤 곧바로 차를 렌트해 서귀포로 향했다.
제주도는 크게 북쪽의 제주시와 남쪽의 서귀포시로 나뉘는데, 제주시가 행정 중심의 도시적인 느낌이라면 서귀포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자연 친화적인 휴양지에 가깝다. 인구도 제주시가 훨씬 많다. 우리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서귀포로 방향을 정했고, 그중에서도 친구가 사는 영어교육도시 인근, 바다와 가까운 지역으로 범위를 좁혔다.
내가 중개인에게 전달한 조건은 단순했다.
단독주택 혹은 타운하우스일 것
마당이 넓을 것
월세는 200만 원 이하
서울에서 집을 구할 때는 ‘직방’, ‘다방’, ‘네이버 부동산’ 같은 앱이 워낙 잘 되어 있어서 매물을 보고, 연락하고, 방문하는 방식이 자연스러웠다. 반면 제주도는 사뭇 달랐다. 물론 네이버 부동산에도 매물이 올라오긴 하지만, 실제로는 등록되지 않은 매물이 꽤 많았다. 중개인에게 전화를 걸어보면, ‘비슷한 조건으로 더 괜찮은 집이 있다’는 얘기를 듣곤 했다. 즉, 현장 발품이 필수였다.
또한 중개인들의 응답 속도도 기대 이하였다. 서울과 달리 즉각적인 대응은 드물었고, 아예 연락이 끊기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처음 6군데에 전화를 돌렸고, 실제로 대화가 가능했던 곳은 2군데뿐이었다. 그중에서 나와 궁합이 잘 맞는 중개인을 골라 총 5개의 집을 보기로 했다.
그날은 아침도 거른 채 곧바로 집을 보러 다녔다. 하나씩 집을 볼수록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간과했는지 알게 되었다. 특히 단독주택 위주로 보다 보니, 관리 상태가 천차만별이었다.
지도상 위치는 괜찮아 보여도, 포장도 안 된 흙길을 한참 따라 들어가야 하는 곳도 있었고, 편의점 하나 가려면 차로 10분 이상 걸리는 외진 지역도 있었다. 게다가 서귀포는 아직 도시가스가 보편화되지 않아, 난방 방식이 기름 보일러인지, 전기 보일러인지, 태양광은 있는지에 따라 관리비가 2배에서 최대 10배까지 차이가 났다. 이건 정말 집을 직접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정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예상치 못했던 냄새. 제주도, 특히 서귀포는 주변에 귤밭과 논밭이 많다 보니, 계절에 따라 거름 냄새가 주기적으로 진동하는 지역이 있었다. ‘1년 내내 거름 냄새 맡으며 살 수 있겠나?’는 생각에, 상상만 해도 스트레스가 넘쳐났다.
그렇게 다섯 채의 집을 둘러본 끝에, 안타깝게도 마음에 드는 집은 없었다. 보는 집마다 하나씩 문제가 보였고, 높은 월세임에도 불구하고 관리 상태가 엉망이었다. 보는 눈은 점점 더 까다로워졌고, 마지막 집 한 채만 더 보고도 만족하지 못하면 비행기표를 하루 미루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약간의 체념과 기대를 안고 다음 집으로 향했다.
기대가 전혀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앞선 집들이 너무 실망스러웠던 탓일까. 이번 집은 상대적으로 모든 게 괜찮아 보였다. 현재 세입자가 있어 관리 상태도 양호했고, 내가 원하던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했다. 편의점도 차로 2분 거리, 동네 분위기도 정갈하고 조용했다. 특유의 냄새도 전혀 없었다. 집 바로 앞에 귤밭이 크게 자리하고 있어 비료를 뿌리는 철에는 냄새가 날지도 모르지만, 완벽한 조건만을 바랄 순 없었다.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한 시간쯤 고민한 끝에, 더 이상의 집을 보기보단 지금 이 순간을 선택하기로 했다. 곧바로 계약금을 송금했고, 그렇게 나의 1년 제주살이는, 조용히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