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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 May 31. 2018

'문전박대'와 '극진환대' 휘둘리는 일본 내 유가족들

'과로사'와 '납치문제'에 대한 극명한 대접차 보여준 아베 수상

일본 정부가 대북문제에서 소외된 건 올해 1월부터 뚜렷하게 나타난 일이다. '납치문제 해결사'를 자처한 아베 수상이 대결 자세만 강조하다 대화판에 끼는 타이밍을 완전히 놓치고 말았다. '미국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만을 외치다 현재는 태세마저 꼬여버린 상황이다. 


납치문제와 일본 외교는, 필자의 관심 주제이기도 해서, 이에 대해선 현재 출판을 고려한 장기 연재를 생각하고 있다(원고를 쓰느라 블로그 글이 늦어졌다). 이번 글에서는 국내적으로 큰 이슈가 되고 있음에도 묻히고 있는, 혹은 일본 정부가 일부러 묻고 있는 문제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최근 아베는 여러 이슈로 궁지에 몰려있다. 사립학원 특혜 제공 문제와 외교 문제, 모두 딱히 해결책이 없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일본 야당의 한심한 수준과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전반적 둔감성, 남북 이슈가 일본 국내 이슈를 잠식하는 모습(예를 들어, 국내 문제보다 남북 대화가 더 큰 뉴스로 다뤄지고 있다. 여기에 별 이슈꺼리도 안돼보이는 미식축국 격투 문제가 연일 화제가 되고 있다)이 이어지면서 근근이 30%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아베와 여당 자민당이 밀어붙이는 법안이 있다. 이른바 '일하는방식개혁 관련법안(働き方改革関連法案)'이다. 이 법은 당초 '동일노동 동일임금' 등 진보 색채를 강하게 풍기는 법안이었다. 노동자들 소득을 늘리는 것과 함께, 장시간 노동을 줄이는 게 핵심으로 안팎의 큰 관심을 모아왔다.


이 법안 내용 가운데 올 들어 두 가지 내용이 큰 논란이 됐다. 


하나가 '재량노동제(裁量労働制)', 다른 하나가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高度プロフェッショナル制度)'다. 이름만 보면 뭔가 노동자들의 권익을 높여주는 내용인 듯 싶지만, 실상이 그렇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면서 비판의 대상이 됐다.


재량 노동제는 한국으로 치면 '유연 근무'와 취지가 비슷하다 하겠다. 원하는 시간에 출근해서 노동 시간만큼 일하고 퇴근한다는 게 골자다. 물론, 모든 업종에 적용할 수는 없으니 특정 업종에 한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하지만 문제는 일하는 시간이 '한달 X시간'으로 정해져있기 때문에, 그 이상 일해도 보상받지 못하는 독소조항이 포함돼 있었다. 물론, 그보다 적게 일하면 노동자쪽이 이득일 수 있지만, 법안의 성격상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 이와 비슷한 기존 노동법 조항이 있어, 블랙기업이 악용해온 점도 논란을 부추겼다.


아래 사이트에 문제점이 잘 정리돼있다.

법안이 논란이 된 건, 후생노동성이 엉터리 자료를 제출하면서부터다. 만약 재량노동제를 도입하더라도 전체 노동시간이 줄어들면 문제없다는 판단이 가능할 것이다. 그게 아베를 비롯한 일본정부가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지난 2월, 언론과 야당을 중심으로 노동 시간 자료가 이상하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제출된 자료는 재량노동자가 일반노동자보다 노동시간이 짧다는 것이었는데, 아베가 직접 국회서 언급하면서 관심의 초점이 됐다. 야당은 검증을 위해 자료 제출을 요구했다.


자료 분석을 통해 밝혀진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하루 야근시간이 45시간이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야근 시간 기록이 없음에도 한달간 야근 시간이 적힌 사람도 있었다. 평균 노동시간을 계산하는 개별 노동시간이 이치에 안 맞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단순 입력실수라고 볼만한 상황도 있었는가하면, 의도적으로 고친 것 아닌가하는 의혹도 나왔다.


이같은 실수(?)가 수백건 발견되면서 결국 일본정부는 '일하는방식개혁 관련법안'에서 재량노동제 부분을 아예 빼버린다. 그러나 황당한 건 이 이슈만으로 상당한 문제인데 사립재단 이슈가 동시에 불거지면서 다소 묻혀버렸다는 점이다.

해당 법안의 초점은 자연스레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로 옮겨갔다. 


이 제도는 좀더 노골적으로 장시간 노동을 방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구체적으로 일부 수입이 높은 전문직종 등에 한해 연간 104일의 휴일을 받을 수 있다면 정해진 액수만 야근 수당을 줘도 되는 제도다. 수입기준은 연 1075만엔이니, 한국돈으로 1억원 이상 정도가 해당된다.


문제가 명확했기 때문에 야당과 과로사 유족 단체는 강하게 반발했다. 과로사를 조장하는 법안이라는 비판도 여기저기서 나왔다. 연봉 기준 등이 내려갈 가능성도 계속 제기됐다. 하지만 사립학교와 남북미대화 등 이슈에 묻혀있던 상황에,  자민당은 기회를 보고 법안 처리를 그대로 밀어붙였다. 지난 25일 중의원에서 야당이 몸으로 막는 상황에도 숫자의 힘으로 처리시켰다.


아래 사진이 많은 것을 보여준다. 충격(?)적인 것은 국회에 과로사 유가족들이 방청을 하러 와 있었다는 점이다. 

법안 통과를 응원하는 자민당 의원의 아래 모습도 비판 대상이 됐다.

참담하게 지켜보는 과로사 유족들(https://article.auone.jp/detail/image/1/2/2/5_2_r_20180525_1527252062536259)

보다 못한 과로사 가족들은 수상 면담을 요구한다. 수상 관저 사무실에 팩스를 보내서 면담을 요청했다. 이에 후쿠시마 미즈호 사민당 의원이 관저 내각심의관(관료)에게 국회에서 다음과 같이 추궁한다. 참의원에서 5월 18일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아래는 오전에 있었던 질의응답으로, 일본 관료의 전형적인 답변 태도를 보여주는 듯해서 옮겨본다.


후쿠시마: 가족회로부터 아베 수상에 대해 면담 의뢰가 팩스로 제출됐습니다. 저희 사무실에서도 보냈습니다. 지금 어떤 상황인가요.

내각심의관: 지적하신 면담 의뢰에 대해, 어제 저녁 21시 지나서 처음 받았습니다. 사무소쪽에서 팩스로 받고, 전화를 받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시간 문제도 있고 해서, 사무적으로 수리했습니다.

후쿠시마: 이건 아베 수상 쪽으로 전해졌다는 뜻인가요. 

내각심의관: 아까 말씀드린 대로, 밤 시간이기도 하고, 사무적으로 수리했다는 뜻입니다.

후쿠시마: 지금 낮시간도 가까워져오니까, 그럼 오후에 다시 이 점에 대해 진척상황을 여쭤보겠습니다.


(오후)


후쿠시마: 총리쪽으로 팩스를 보냈다고 들었는데요, 그렇지요?

내각심의관: 오전중에 답변드렸습니다만, 사무적으로 수리를 했습니다.

후쿠시마(조금 어조가 열받은 듯 변함): 관저에 제대로 보내신 건가요?

내각심의관: 반복되는 대답으로 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만, 사무적으로 수리를 했다는 취지입니다.

후쿠시마(열받은 어조): 그 뒤에 어떻게 된 건가요!


이런 한심한 질의응답이 반복된다. 아래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온 대화를 가져왔다. 1시간 14분 36초부터다.


결국, 아베는 이들 유가족과의 면회를 명시적으로 거부한다. 


"후생노동성이 대응하는 게 적절하다"는 이유를 들면서 "가족을 과로사로 잃고 굉장히 고통스러워하는 기분은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공감을 표시했다. 그러면서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를 잘 아는 건 내가 아니라 해당 대신(장관)"이라고 둘러댔다. 


결론적으로 만나봐야 정치적으로 이득이 되지 않으니 무시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처사였다. '아베노믹스'의 노동 중시라는 게 얼마나 허구에 가까운지도 잘 보여준 사례라 하겠다.

그러면서 정작 아베는 다른 가족들을 관저로 불러서 극진히 맞이한다. 북한 납치피해 가족들이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아베가 과로사 노동자들과의 면담을 거부한 당일이었다. 그러면서 납치 피해가족들에게 "트럼프를 만나서 납치문제의 중요성을 꼭 전하겠다"고 힘줘 강조했다. 기사에 따르면 긴급하게 면담을 잡은 건 가족들이 아니라, 정부쪽이었다. 


정치인이 자신에게 득이 되는 사람과 아닌 사람을 만나는 건 어떤 의미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같이 대놓고 차별 대우를 하는 건, 그것도 일국의 수상이 그러는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에 대해 별다른 비판도 나오지 않는 게 현 일본의 상황이다.


어떻게든 자신이 처한 문제에서 빠져나오려 발버둥치는 상황이지만, 타개책은 보이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딱히 물러날 만한 상황도 아니라는 듯 버티고 있다. 일본 정치다운 교착상태라 할만한 상황 속에, 누구 하나 나서서 해결할 능력도 없어보인다. 


일본의 현재 문제는 대북 외교에서 뒤쳐진 게 아니라 민주적으로 의사반영할 구조가 실종되고 있다는 데 있다고 새삼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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