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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 Jul 27. 2018

가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어느 가족(만비키가족)'이 세계에 던지는 질문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 감독 영화는 이전에 '걸어도 걸어도(歩いても歩いても)' 한 편을 봤다. 기타 유명 작품에 대해서는 여기저기서 많이 들어봤지만 연이 닿지 않았다. 그럼에도 '걸어도 걸어도'가 준 인상은 깊었다. 일본의 가족, 나아가 한국의 가족에 주는 의미가 크게 와 닿았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할아버지가 "내년은 설날이겠구나"하는 대사와, 아들네 가족이 집에 돌아가며 "내년 설날에는 안 와도 되겠지" 하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엇갈림'을 상징하는 장면이라고나 할까.


'어느 가족'을 본 건 도쿄 우에노의 한 대형 극장에서다. 지난달말께 봤다. 마침 영화의 배경이기도 한 도쿄 서민가(닛포리, 아다치구 일대)가 우에노와 가까운 지역이라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마침 7월 26일 개봉했기에 감상을 몇 자 적어볼까 한다. 


줄거리는 영화 사이트나 평론 등에서 볼 수 있을까 싶어서 나름대로 의미를 풀어보는 내용이 중심이다.




한국명은 '어느' 가족이라고 돼있지만 일본 원제는 '만비키 가족(万引き家族)'이다. 


만비키란 상점에서 물건을 슬쩍하는 행위를 말한다. 좀도둑의 일종(?)이긴 하지만, 집을 터는 것(빈집털이는 아키스空き巣라고 한다)을 만비키라고 하지는 않기 때문에 한국어 번역에 고심을 했을 듯 싶다(개인적으로는 '만비키'쪽이 영화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어떻게든 원제를 살렸으면 싶었지만).


아래 칼럼에서는 '좀도둑 가족'이라는 표현을 썼다.



알려져있듯, 이 영화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최우수상)을 탔다. 일본 내에서도 화제가 됐다. 


하지만, 감독이 반 아베 성향으로 유명한 사람이라 수상 후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일본 정부 지원금을 받아 영화를 만들고도 은혜를 모른다는 주장이 나왔는데, 어떤 교수는 "그럴 거면 야당에 세금 주는 것도 막아야 하는 거냐"고 비꼬기도 했다. 그만큼 일본의 민주주의가 위험 수위에 왔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




영화가 끊임없이 건네는 질문은 '가족이라는 게 대체 뭐냐'는 거다. 


여자아이를 제외하고는 초반부 직접적으로 명확히 가족이 된 계기가 나오지 않는다. 할머니, 아저씨, 30대 여성, 미성년자 셋, 이렇게 6명이 모여살고 있지만, 이들 누구도 '피'로 연결된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기묘하게 서로 의존하면서 살아간다. '돈 때문인지', '의존하려는 마음 때문인지' 확실치 않은 경계를 오가며 산다.


만비키가족의 주요 등장인물


'가족' 가운데 정기적으로 일하면서 사는 사람도 많지 않다. 


할머니는 연금과 함께 전남편과 관계가 있는 듯한 가족에게서 정기적으로 돈을 받는다. 아저씨는 가끔 막노동을 나가지만 자주 다치고 보통은 아이들과 함께 가게에서 도둑질을 한다. 여고생은 업소에 나간다(영화에 나오는 업소는 JK리프레시라고 하는 곳으로 직접적인 성적 서비스는 없지만 매직 미러로 다양한 행동을 보여준다).

 

30대 여성만 세탁 업소에서 열과 성을 다해 일을 한다. 그러나 여성 역시 '가족을 늘린 일'이 간접적 계기가 돼 직장을 그만두게 된다.


영화의 시선은 대체로 남자 아이가 중심이다. 


다른 누구보다 가족 내에서 안정적인 위치에 있는 듯한 남자아이는 능수능란하게 물건을 훔쳐낸다. 그걸로 가족에게 인정을 받는 동시에, 좁디좁은 집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자기만의 공간을 갖고 있다. 


여자아이가 새로 '가족'이 되자 도둑질뿐만 아니라, 가족으로서의 역할도 교육하게 된다. 평소 집에서 아동학대를 겪던 여자아이는 다른 가족들의 관심 속에서 어느새 여동생이면서 딸이 되어간다. 바닷가로 가족 여행도 가고, 허름한 집에서 보이지 않는 불꽃놀이 소리를 들으며 6명은 행복에 젖는다. 


이 시점이 되면 관객들도 이들이 핏줄로 묶여있지 않지만 가족처럼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영화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전개는 호칭이다. 


아빠라고 부를지, 오빠라고 부를지, 이를 요구하는 목소리와 거부하는 목소리가 종종 교차한다. 물론그때는 서로가 비교적 가깝다고 느껴질 때다. 가족의 호칭을 포기하는 순간, 그걸로 연이 끊어져간다는 상징적인 장면도 등장한다. 후반부에 나오는 클라이맥스의 하나.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소소한 도둑질을 연습할 때는 동네 구멍가게(다가시야駄菓子屋라고 한다)를 찾아간다. 주인 할아버지가 한눈을 파는 사이에 두 아이가 협조해 물건을 빼낸다. 뭔가 아슬아슬하지만, 원체 할아버지가 허술해보여 무리없이 성공한다.


구멍가게 주인 할아버지
일본의 전형적인 다가시야 (https://userdisk.webry.biglobe.ne.jp/015/241/27/N000/000/002/12722022021581612187)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장면이지만, 다가시야에서의 만비키는 남자아이를 바꾸는 계기를 제공한다. 


모른 척하던 할아버지가 어느 순간 "'여동생'한테는 (도둑질) 시키지 말아라"하면서 '다 봐왔다'는 말투로 타이르며 아이스크림을 건넨다. 남자아이는 멍하니 서 있다가 돌아간다. 어느날 두 아이가 다시 찾아온 가게에는 '상중(喪中)'이라는 종이만 붙어있고 문이 닫혀있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뜬 것이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훈계'를 한 할아버지가 숨진 걸 계기로 남자아이는 급변한다. 일부러 슈퍼에서 물건 훔치는 모습을 들키도록 한 뒤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크게 다친다. 이게 '가족 해체'의 계기가 된다.


남자아이가 붙잡히기 전에 할머니도 갑작스레 쓰러져 세상을 뜬다. 죽음을 알릴 수 없었던 나머지 가족들은 할머니를 집에 그대로 파묻고 연금을 계속 받아간다(고레에다 감독은 실제 있던 이같은 사건이 영화의 모티브가 됐다고 한다). 할머니가 집 소유자였던 점도 이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요인이다.


다만, 애초 여자아이를 데려왔던 게 세상에는 '유괴'로 알려졌던 터다. 아저씨와 30대 여성은 남자아이의 입원과 동시에 도망가다가 체포된다. 남자아이의 진짜 부모가 아니라는 점이 발각될 걸 두려워해서였다.


30대 여성이 경찰에 하는 진술 과정은 영화가 관객에게 최초로 던지는 '돌직구'인데, 이에 대해서는 직접 보시길 바란다. 영화는 역설적으로 집에 돌아간 여자아이가 행복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남자아이도 오랜 기간 살아왔던 '가족'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 한다. 여성이 면회온 남자아이에게 처음으로 데려온 경위를 말하면서다. 


하지만, 아이를 데려온 곳이 '파칭코 가게'라는 점에서 이 역시 부정적인 미래를 암시한다. 일본에서는 종종 파칭코가게 주차장에 방치됐던 아이가 죽어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가족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는 걸까. 


외부에는 비정상적으로 보일지라도, 그 자신들이 만족하고 문제없이 살아가면 그걸로 되는 걸까. 영화는 있을 법한 설정과 전개로, 가족의 경계선을 끊임없이 질문한다. 가족도 '만비키'로 꾸려낼 수 있는 걸까. 영화 제목이 '만비키가족'인 건, 결국 '물건을 훔치는 가족'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만비키로 만들어진 가족'이라는 것임이 명확해진다.


개인적으로 한국 영화 '가족의 탄생'과도 겹쳐 보이는 지점도 적지 않았다. 포스터도 묘하게 겹쳐보인다. 이 영화를 보고 가족의 의미를 되새긴 기억이 있는데, 어느 가족과 함께 보면 더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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