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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 Aug 22. 2018

오사카 인권박물관과 부라쿠민 문제

일본 내 뿌리깊은 차별을 겪은 부라쿠민들

일본을 동서로 나눌 때, 관동(칸토関東)/관서(칸사이関西)라는 말을 쓴다. 여기서의 '관'은 에도 막부를 연 결정적 전투가 있던 '세키가하라(関ケ原)'가 기준이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를 거두면서 일본의 주도권은 동쪽으로 넘어가게 된다. 현재의 세키가하라는 그냥 시골에 지나지 않지만 여전히 교통의 요지로, 도카이도선(東海道線)과 신칸센이 지나간다.


일본 관동과 관서의 차이는 한국에도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사투리라든지 오사카쪽이 좀 더 활발하다든지 등등. 이같은 일반적인 문화적 차이 외에도 이 두 지역을 가르는 하나의 큰 사회적 문제가 있는데, 이른바 '부라쿠민(부락민部落民) 문제'다. 


부라쿠민은 에도시대 이전부터 사회적으로 차별받던 직업에 종사해오던 사람들로, 도축, 가죽 세공, 장례업 등을 도맡아왔다. 조선시대에도 비슷한 계층이 있었지만, 일본처럼 근대 이후까지 비슷한 지역에 모여 산 사례는 얼마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최소한 현대에 이같은 지역을 인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된다 (어떤 사람에 대해 조선시대 출신이 비천하다고 혹은 그런 지역 출신이라고 결혼을 반대하는 일이 얼마나 될까?).


근대 이후 일본은 국내적으로 큰 지리적 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전쟁 때 폭격과 공습이 있었지만 이로 인해 다른 지역으로 집단 이주한 일은 거의 없었다. 그 결과 부라쿠민 거주 지역은 외부인 유입 없이 그대로 유지돼왔다. 특히, 이같은 집단거주지는 관동보다 관서(일본 서쪽) 지역에 집중돼 있었다.


이 때문에 부라쿠민 문제에 대해 관동 사람들은 대체로 별 감흥(?)이 없다고 한다. 필자가 만나본 도쿄나 토호쿠(東北) 지역 출신 선생님이나 학생들은 부라쿠민에 대해 한국어처럼 '부락(마을)에 사는 사람들' 이상의 뉘앙스는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애초 인식이 없기 때문에 차별도 없는 셈이다.


하지만 관서는 완전히 달랐다. 


불과 2년전 들은 것으로, 시코쿠(四国)의 어떤 부라쿠민 지역 출신이 상대방 부모에게 출신 성분(?)을 이유로 결혼을 반대당한 이야기였다. 과거일인 줄 알았는데 일본 서쪽 지역은 부라쿠민 문제가 현재진행형이었다.


문제는 현대 일본에서 외모나 언어로 부라쿠민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는 데 있다. 똑같은 일본어로 말하고 인종적으로 다른 것도 아니다. 재일조선인/한국인처럼 국적이 다르지도 않다. 다만, 호적제가 남아 있어 부락의 호적을 유지하고 있다면 결혼이나 취직할 때 알려질 수 있다 (그럼에도 호적지를 바꾸는 게 쉬워지면서 이것만으로도 구별하는 건 더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서일본에서는 '인권 교육'이라는 이름하에 적극적으로 부라쿠민을 '동화'하려는 정책을 취해왔다. 학교에서도 부라쿠민 차별의 문제를 강조하고, 부라쿠민이라는 말 자체가 갖는 차별적 느낌 때문에 되도록 다른 단어를 쓰도록 하기도 해왔다. 


한국에는 재일조선인/한국인 문제가 많이 알려져있지만 부라쿠민이 숫적으로 많았기에 전후 일본의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다. 다양한 단체가 결성됐고, 차별 철폐를 내걸어 활동해왔다. 현재에도 입김이 센 단체 가운데 하나로 부락해방동맹(部落解放同盟)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만 보조금 횡령 등의 문제로 사회적 시선이 따가운 적도 있었다. 순수한 단체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일전에 이 블로그에서도 소개한 바 있는 '일본deep안내(日本DEEP案内)'에서 나가사키 시안바시(思案橋) 지역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가게명을 비꼬는(?) 내용을 적어두고 있다. 


https://deepannai.info/nagasaki-shianbashi-4/

가게의 이름은 이자카야 너구리 '부락'(狸部落)으로, 설명은 '역시 DEEP 존에 있는 이자카야라서인지 네이밍마저 돌출돼있다. 인권에 꽤나 시끄러운 관서나 추고쿠, 시코쿠(中四国) 주변이라면 이 이름은 아웃일 것이다.'


큐슈에서도 물론 부라쿠민 문제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관서, 추고쿠(히로시마주변), 시코쿠가 역시 부라쿠민 문제가 집중됐다는 뜻으로 생각된다.




서론에서 길게 설명한 건, 우연히 오사카의 한 박물관을 찾아가 새삼스레 부라쿠민 문제의 현재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8월을 맞이해, 일본 중요 지역의 '평화' 관련 시설을 돌아보려던 차에 오사카에 '인권 박물관'이라는 곳이 있다는 걸 구글 검색으로 알게 됐다. 


딱히 미리 행선지를 정했던 것은 아니었다. 시내에서도 멀지 않았기에 가봐도 나쁘지 않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찾았다. 오사카를 와본 것은 이미 십수차례로 더 갈 데도 없던 상황이기도 했다.


오사카인권 박물관 위치. 왼쪽 가운데 있는 곳으로 오사카 중심가 난바는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출처: 구글지도


가장 가까운 역은 JR환상선(環状線) 아시하라바시(芦原橋). 


이마미야나 신이마미야에는 내려본 적이 있지만, 아시하라바시는 이름도 기억안 날정도로 마이너한 역이었다. 실제 내려보니 길거리는 이상하리만치 깨끗했지만, 토요일(8월 4일)이었음에도 상점가에 활기가 하나도 없었다. 



날씨가 매우 더운 것도 한 몫한 듯 길거리에는 사람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다만 게시판에 인상적인 문구가 있었다.


길거리 풍경


상당히 오래돼보이는 게시판 아래에 '모든 차별의 조기철폐와 인권 존중 마을 만들기를!! -오사카시 나니와 인권협회' 라고 쓰여있던 것이다. 정작 게시판에는 아무런 게시물도 붙어있지 않았지만 일본 내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문구가 느낌표 두 개를 달고 적혀있었다.


오사카 인권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몇군데 똑같은 문구를 적은 게시판이 있었다. 특이하다고만 생각하고 딱히 생각을 깊게 하진 않았다. 인권 감수성이 높은 지역이겠거니, 하고만 되새기고 말았다.


오사카 인권박물관은 역에서 한 10여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일본에서 대체로 '평화 어쩌구' 박물관은 많이 접했지만 '인권'을 거론한 곳은 드물었기에 전시 내용이 궁금했다.



입장료는 500엔이었고 관내 촬영은 금지였다. 그덕에 찍을 수 있는 사진은 없었다. 아래 퍼온 사진들은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들이다(http://www.liberty.or.jp/exhibit/index.html#zone2).


전시는 처음에 '평화'를 강조하는 여러 전시물들이 있어서, 속으로 "그럼 그렇지"하고 한숨을 쉬려던 찰나, 안으로 들어갈수록 깊이가 느껴졌다. 


일본에서 차별을 받아온 집단들을 망라해 구체적으로 사진과 함께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재일 조선인/한국인(자이니치 코리안在日コリアン)을 비롯해, 미나마타병 환자들(水俣病), 이지메 피해 학생들, 아이누 민족, 한센병 환자들(한국의 소록도-사실 소록도도 일본이 만든 것-처럼 일본에서도 한센병 환자들을 집단 생활 시켰다), 그리고 부라쿠민들이었다. 


한국에서는 어느덧 잊혀진 듯한데, 미나마타병은 이른바 공해병이다. 큐슈 쿠마모토 지역 공장에서 수은이 대량으로 바다와 강을 오염시켰고 생선 등을 섭취한 사람들이 원인 모를 신경병을 앓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와 회사(칫소)측은 피해를 은폐하는 데 급급했고 미나마타병 환자들은 투쟁과 소송을 통해 피해를 적극 알렸다. 정부와 미나마타병 환자들 사이의 문제는 2000년대에야 비로소 어느 정도 타결을 보게 된다.


미나마타병 환자들을 다룬 코너에서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도운 의사의 수기가 인상 깊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지역에만 환자가 집중돼있다는 사실에 충격 받았다는 내용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필자가 초등학생이던 시절(90년대초반), 미나마타병을 소개하는 비디오를 틀어준 적이 있어 아직도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있는데,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다)



부라쿠민 관련 자료는 유독 굉장히 많고 풍부했다.


자료를 하나하나 따라가다보니, 박물관터 자체가 과거 피혁제품을 만들던 부라쿠민 집단 거주지였음을 알게 됐다. 역 근처에 수제 구두 공방이 몇 곳 있던 것도 납득이 갔다.


이 지역 부라쿠민들은 전쟁이 끝나고 차별 철폐 운동을 벌이다, 지자체와 타협끝에 차별철폐 박물관을 만들기로 했다고 한다. 1985년 건립됐으니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다. 부라쿠민해방동맹 등 단체들이 적극적으로 모금운동을 하기도 했다고.


일본 박물관의 특징(?)이기도 한 듯한데, 오사카 인권박물관은 특히나 피해자들의 증언 비디오를 충실히 갖춰놓고 있었다. 어떤 차별을 겪었고, 어떻게 싸워왔으며,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등등. 모든 비디오를 보지는 못했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와닿았다.


전시 자체는 대부분 일본어고 일부 영어 설명이 곁들여져 있었다. 아마 한국어 팜플렛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진을 훑어보고 영어 설명을 대강 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일본어 자료를 읽을 수 있다면 책 한 권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사진 촬영을 금지한 이유도 안에 과거 부락지도라든지 현재의 피차별인들에게 생길 2차 피해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다만, 지금 오사카인권박물관은 위기에 처해있다고 한다. 오사카 지역 정치가 최근 포퓰리즘적 극우정당에 휘둘리고 있는데, 그 여파로 오사카부와 시(大阪府)가 1억엔 이상의 자금 지원을 끊었다고 한다. 애초 부지도 지역주민들이 교육을 위해 쓰라고 시에 기증한 것이었음에도 이제는 임대료를 내라고 강압적으로 나오고 있다고 (소송까지 제기).


이 때문에 박물관은 후원자 모집에 사활을 걸고 있다. 그나마 오사카의 뜻 있는 시민들이 후원해 그럭저럭 버티고는 있지만 쉽지는 않다고 한다. 부라쿠민 출신으로도 알려진 일본의 극우 포퓰리스트 하시모토 토오루(橋下徹)는 오사카 정계를 떠났지만, 그 폐해는 여전히 지역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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