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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 Nov 30. 2018

원폭 피해자 바로보기

일본은 정말 원폭 피해자를 내세워 '피해자 코스프레'를 해 왔나

오늘 김어준씨가 진행하는 라디오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들었다.


"정작 일본은 원폭 피해자에게 개인의 보상은 미국더러 요구하라고 계속 격려한다. 일본 극우들이 자신들의 피해임이 드러나는 사안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격려한다."


이 말은 원폭 피해자가 일본 국내 정치에서 갖는 위치에 대한 '완벽한 몰이해'에서 나온 발언이다. 일본 정부는 '단 한번도' 원폭 피해자더러 미국에 보상 요구하라고 한 적이 없다. 또한 극우와 원폭 피해자의 관계는 상극이다. 대개의 한국분들도 김어준씨와 다르지 않은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라 생각되기에 오랜만에 몇 자 적어볼까 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원폭이 떨어진 건 45년 8월 6일, 9일이다. 수만명에서 수십만명이 죽었을 것으로 추산되는데, 피해가 광범위하기에 정확한 집계는 분석마다 제각각이다. 이걸로 인해 당시 천황이 항복을 선언하고, 전쟁이 끝났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반도도 일본에서 해방됐다.


그 뒤 45년부터 51년까지 일본 내에선 미군 통치(미군정)가 시작된다. 이 6년간 원폭 피해에 대해 발설하거나 작품화하는 건 '검열 대상'이 돼서 철저히 금지됐다. 민간인들에 대한 피해가 서서히 알려졌지만, 원폭 문제는 '패전 원인의 하나'로 각인됐을 뿐 일본 전체에 바로 파급됐던 건 아니다. 원폭 피해 발설은 터부였고, 미군 눈치보기에 급급했던 일본 당시 정부도 이에 대해서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는다. 물론, 피폭지의 불만은 컸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51년, 미국(정확히는 서구 연합국)과 일본 사이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맺어진다. 미군정을 끝내고 실질적으로 일본이 독립하게 된 계기다. 이 조항에는 최근 징용공 문제로 주목받는 것과 비슷한 조항이 하나 들어있었다.


19조에 보면 '일본은 전쟁으로부터 발생했거나, 전쟁상태의 존재로 말미암아 취해진 조치들로부터 발생한 연합국들과 그 국민들에 대한 일본국민들의 모든 청구권을 포기하는 한편, 본 조약이 발효되기 전에 일본 영토 내에서 연합국 군대나 당국의 존재나 직무 수행 또는 행동들로부터 생긴 모든 청구권을 포기한다.'라는 내용이 있다.


패전국이니만큼 당연하다 할 수도 있는 조항이라 하겠는데, 연합국도 일본에 전쟁 관련해 돈 내라 하지 않을 테니, 너희들 탓으로 일어난 전쟁 피해는 알아서 해결하라는 게 요지다. 이 조항으로 일본 내 피폭자들은 미국에 보상 요구를 하지 못하게 됐고, 처음부터 '패전국민'이라는 입장도 있기 때문에 미국을 비난하는 이상의 움직임은 보이기 힘들었다(이같은 분노가 생생하게 드러난 작품이 '맨발의 겐(はだしのゲン)'이다).


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고, 그때에서야 원폭 피해자들의 국내 정치가 활발하게 시작된다.


결정적 계기가 된 건 54년 '비키니섬 어선 피폭사건'이다. 이 때 미국의 수소폭탄 실험으로 원양조업을 하던 어부들이 피폭된다. 그 가운데 한 명은 생존해 귀환했지만 피폭 때문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간다. 이것이 일본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고 9년전의 원폭 피해 관련한 내용도 검열에 대한 반동으로 폭발적으로 쏟아진다. 이것이 55년에 처음 히로시마세계원수폭금지대회가 열린 배경이다.


이 대회에서 다양한 피폭자 단체가 생겨난다. 그들이 요구한 건 '일본 정부의 전쟁 책임 인정' 문제였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어차피 미국에 책임을 물을 수 없으니, 전쟁을 일으킨 일본 정부가 책임을 인정하고 피폭자들에게 사과하라는 게 골자였다. 해당 내용을 법안화한 게 이른바 '피폭자원호법(被爆者援護法)'이다.


주요 피폭자단체들의 출발점이 반정부, 구체적으로 전쟁 책임과 관련 있는 '자민당'에 대한 반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60년대 이후 피폭자단체들의 분열로 자민당 지지세력도 생겨나는 건 사실이지만, 냉전시기 사회당과 공산당 등 주요 혁신계 야당 지지기반은 이같은 피폭자단체였다(이는 현재도 크게 변함 없지만 1세대 피폭자가 다수 사망하면서 단체들도 어려움을 겪고 있음, 여전히 히로시마 출신 국회의원은 자민당이어도 대체로 온건파).


피폭자단체의 투쟁과 야당과의 결합이 분명해지면서 대책마련에 내몰린 자민당 정부는 1957년 '피폭자의료법' 1968년 '피폭자특별조치법'을 제정한다. 두 법안의 내용은 '피폭자들이 힘들게 고생하니까 의료지원은 어느 정도 해주겠다'는 취지(피폭자 수첩 배부하고 의료비 할인 등이 담김)였고, 단체의 요구인 정부의 책임 인정은 담기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일본 정부가 현재 보이는 전후 보상 문제와 맥을 같이 한다 하겠다.


일본 정부의 주장은 "피폭자의 특수성과 전쟁책임을 인정하면 다른 공습 피해자와 같은 사람들이나 기타 민간인 피해자들도 보상해달라고 할 거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데 있었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 조약 이후 일본 정부가 서둘러 '군인과 군속에 대한 원호법'을 만들어서 보상한 걸 생각하면 피폭자에 대한 책임인정이 정치적으로 이득될 게 없다고 생각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당시 참전 군인과 가족으로 이뤄진 '일본유족회'는 여전히 자민당의 주요 지지기반이고 야스쿠니 참배를 간절히 원하는 곳 중 하나다).


일본 정부는 1979년 이같은 전후 보상 문제를 논의하겠다고 기구를 만든다(政府懇談会). 하지만 거기서 나온 결론은 '피폭자나 다른 전쟁 피해자나 다를 게 없으니 그냥 받아들이고 살라'는 내용이었다. 이른바 '수인론(受忍論)'이었고, 이에 피폭자단체가 크게 반발했지만 정책적 변화는 없었다.




60년대까지 주로 자신들의 피해와 전쟁문제를 연계해 강조해온 피폭자단체들은 70년대 '데탕트 시대(중일 국교정상화 등)' 이후 일본의 가해 책임에도 눈을 떠간다. 피해만을 주장할 게 아니라, 일본의 전쟁 책임과 관련해 더 많은 아시아사람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한다. 하나의 계기는 일본에서 피폭당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생활하다 일본서 재판 투쟁을 시작한 손진두씨였다.


아래 기사다.



손진두씨 관련 일본 대법원 확정판결은 '국가가 광범위하게 책임질 것'을 규정했다. 물론 피폭자단체와 일본 시민사회의 뒷받침이 영향을 줬다. 판결문은 아래 일본 대법원(최고재판소) 사이트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일본어).


http://www.courts.go.jp/app/files/hanrei_jp/349/035349_hanrei.pdf


냉전 시기 지지부진한 상황이 계속되다 소련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한 1989년, 일본 상원인 참의원에서 처음으로 '여소야대 국면'이 만들어진다. 이 때 사회당과 공산당, 공명당 등이 참의원에서 가결시킨 법안이 위에서 말했던 '피폭자원호법'이다. 여기에는 일본 정부가 피폭자와 전쟁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으로 명시해놓았지만, 하원인 중의원에서 자민당 주도로 법을 폐기시킨다.


위의 '김어준씨의 오해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되는 현상(일본의 원폭 피해자 행세)'이 잇따라 일어나는 건 90년대 중반이다.


예를 들어서, 히로시마 원폭돔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게 96년이고, 일본 정부가 피폭국임을 강조하며 주도적으로 유엔에 '핵폐기결의안'을 내기 시작한 건 94년이다. 그리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국립'추모시설 건립이 비슷한 시기 시작된다. 이전까지는 지자체와 관련 단체 주도로 각종 시설이 만들어졌지만 정부가 주도하지는 않았다. 일본의 원폭 피해자 행세가 국가적 사업이 된 것이다.


그러면 이 때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994년 일본에서 전후 처음 사회당 정권(연립 정당은 자민당, 사회당, 사키가케)이 들어선 게 결정적이었다.


이를 계기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수상은 일본의 잘못으로 비롯된 전쟁과 식민지 관련 문제를 청산하려고 시도한다. 한국에서는 주로 대외적인 것만 부각돼있다. 대표적으로 전쟁과 식민지, 위안부 문제 반성을 담은 '무라야마 담화' '고노 담화(고노 요헤이는 자민당 출신이었지만 당시 각료)'가 있겠지만, 일본 국내적으로도 그동안 청산 못했던 문제들을 해결하려 시도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게 '피폭자원호법'이었다.


사회당은 국가 전쟁책임을 명확히 해서 이제 피폭자들의 한을 풀어주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연립 여당이었던 자민당은 완강히 반대한다. 기존 노선도 있거니와 자민당 내 의원들의 개인적 연결점으로 볼 때 전쟁 책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인물들도 적지 않았다.


결국 타협안으로 국가 책임과 관련해 굉장히 애매한 문구를 넣은 법이 성립한다. 이례적으로 전문(前文)이 들어갔는데, 굉장히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점철돼있다.


ここに、被爆後五十年のときを迎えるに当たり、我らは、核兵器の究極的廃絶に向けての決意を新たにし、原子爆弾の惨禍が繰り返されることのないよう、恒久の平和を念願するとともに、国の責任において、原子爆弾の投下の結果として生じた放射能に起因する健康被害が他の戦争被害とは異なる特殊の被害であることにかんがみ、高齢化の進行している被爆者に対する保健、医療及び福祉にわたる総合的な援護対策を講じ、あわせて、国として原子爆弾による死没者の尊い犠牲を銘記するため、この法律を制定する。


'여기에 피폭후 50년이라는 시간을 맞이하여, 우리들은 핵무기의 궁극적 폐기를 향한 결의를 새롭게 하고, 원자폭탄의 참화가 반복되지 않도록 항구 평화를 염원하는 동시에, 나라(국가)의 책임에 있어서, 원자폭탄의 투하의 결과로서 생긴 방사능에 기인하는 건강피해가 다른 전쟁피해와 다른 특수한 피해임을 고려해,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피폭자에 대한 보건, 의료 및 복지에 대한 종합적 원호대책을 강구해, 나라로서 원자폭탄에 의한 사몰자의 고귀한 희생을 기록하기 위해 이 법률을 제정한다.'


결국 사회당이 자민당에 적잖게 양보해 이같은 법안이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이를 통해, 앞서 적은 대로 피폭자 관련한 국가사업이 시행되는 계기가 된다.


정리하자면, 일본의 피폭자 문제 역시도 무라야마 정권 당시 하나의 과제였고, 그들이 받아온 대접은 한국인 피해자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냉전시대에는 원폭증에 대한 몰이해로 인한 일상적 차별(특히 취직 문제 등)이 만연해있었다.


이른바 '피해자 코스프레' 인식은 사회당이 너무 늦게 집권했다는 점과 한국인들의 이해부족이 겹쳐서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다. 사회당이 냉전 시기 한 차례라도 집권해 전후 문제에 전향적으로 나섰다면 식민지와 전쟁에 관한 역사 문제가 이렇게 까지 복잡해지진 않았을 것이다(물론 여기에는 일본 정치와 국민의 민주주의적 능력 부족도 적잖이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이른바 일본의 극우들은 피폭자들을 동정을 했을지언정 전쟁책임을 인정하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의 피폭자성을 일본이 핵무기를 가져야 한다거나, 미국과 붙어야 한다는 식으로 악용한 적은 있지만, 최소한 피폭자단체와 지지세력의 대체적인 입장은 극우와 정반대였다.


김어준씨의 영향력이 적지 않기에, 잘못된 인식이 확산되는 것을 걱정해 정리되지 않은 글이나마 적어봤다. 개인적으로 지난 1년간 일본의 피폭자 정치에 대해 연구해왔기에 궁금한 게 있으시면 댓글오든 메일로든 환영한다. 물론 비판에 대해서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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