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적 이미지의 교토, 상반된 모습의 공산당 지지
일본 정치를 공부하다 보면, 관련 학자들이 천착하는 몇 가지 중요한 문제들과 만나게 된다.
예를 들어,
- 자민당은 왜 냉전시대, 그리고 최근까지 장기집권을 할 수 있었을까(있을까)
- 사회당은 냉전 붕괴 이후 왜 한 번에 망해버렸을까
와 같은 질문들이다. 이 정도로 큰 질문은 아니지만 흥미로운 주제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과거 수도 교토와 공산당'의 관계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존재의 관계를 두고 다양한 견해들이 제기돼왔다.
한국에서도 교토에 가보신 분은 많으리라 생각한다. 오사카와 함께 세트로 돌아보기도 좋고, 거리 분위기나 절/신사가 곳곳에 있는 점도 매력적이다. 필자도 십 수 차례 갔지만 아직도 갈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드는 곳이 교토다.
그러한 교토에서 당연하게도 '좌파색'은 그다지 느끼지 못할 것이다. 오랜 기간 일본 천황이 있었던 지역이고, 교토 사람들은 보수적이라는 '편견 아닌 편견'이 일본 내에서도 강하다. 그럼에도 교토(특히 교토시)는 일본 내에서도 유수의 공산당 지지기반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들이 대립하고 있다.
몇 가지를 들어보자면,
- 교토대라는 매우 리버럴한 학풍을 가진 대학의 영향
- 관동(도쿄권) 중심으로 한 자민당 정치에 대한 반골 기질
- 대기업보다 중소 영세기업이 다수
등등이 거론된다.
우선 실제 교토 내 공산당 지지가 여전함을 최근 선거 결과로 살펴볼까 한다. 다음은 2017년 중의원(하원) 선거 결과다. NHK 선거 결과 홈페이지를 참고로 했다. 아래 교토1구는 교토 중심에 있는 지역이다.
빨간색의 이부키 분메이(伊吹文明)는 자민당 거물인사다. 여기에 맞붙은 공산당 코쿠타 케이지(穀田惠二)가 보라색으로 공산당 출신이다. 선거구에서는 졌지만 33.3%로 득표율이 높았기에 비례 부활 당선했다.
다음은 교토 동쪽의 2구다.
민주당 출신의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보수적 외교안보관을 가졌지만 교토대를 나왔고 지역 내에서는 비교적 인기 인물, 민주당 정권 당시 외무상)가 압도적 득표율로 자민당을 꺾었지만, 맨 밑의 공산당 후보도 21.3%라는 적지 않은 투표 결과를 보이고 있다.
이밖에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공산당은 전체 선거구에 후보를 낸 것은 물론, 대체로 15~20%라는 득표율을 얻고 있다(오사카도 공산당세가 비교적 있지만 교토만큼은 아니다).
2016년 참의원 선거는 중선거구제라 교토 선거구에서 두 명을 뽑는다. 여기서는 공산당 후보가 20%로 낙선했다. 후쿠야마 테츠로는 입헌민주당 출신으로 역시 교토에서 비교적 인기 있는 인물로, 마에하라와 달리 상당히 리버럴하다.
반대로 2013년에는 비슷한 득표율로 공산당 후보가 당선됐다.
교토시의회는 현재 자민당 세력이 19석이고, 공산당이 그 뒤를 잇는 18석이다. 특히 시내 중심부에서는 공산당 세력이 힘을 쓰고 있다.
2012년 교토시장 선거 때는 공산당 vs 다른 모든 당(자민, 공명, 민주, 사민 등)의 추천을 받은 후보가 1대 1로 붙었는데 공산당 쪽이 46.1%로 선전했다(2008년에는 공산 쪽이 37.0%로 자민당 쪽 37.2%에 아주 작은 차이로 패배). 이 정도면 신기할 정도로 공산당세가 센 것이 확인되는 셈이다.
물론, 냉전시대에는 니나가와 토라조(蜷川虎三)라는 사회당 출신 교토부지사(京都府知事)가 무려 28년간(50~78년) 집권한 적도 있다는 데서 보듯, 교토의 좌파성향(?)은 뿌리 깊다고 할 수도 있겠다.
자민당 유력 정치인 노나카 히로무(野中広務)는 교토에서 정치를 시작한 계기가, 공산당과 같은 좌파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고 한 걸 보면 냉전시대는 아마도 지금보다도 더 세력이 컸으리라고 본다. 사회당의 몰락으로 그 지지세가 공산당으로 그대로 옮겨갔다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지난해 교토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교토 내 공산당 지지기반에 대한 한 가지 가설을 들을 기회를 얻었다. 도시샤 대학 이이다 켄(飯田健) 선생의 발표로, 결론부터 말하면
교토 내 전통산업이 오히려 공산당 지지기반을 만들어줬다
는 아이러니에 대한 얘기였다.
교토에는 8세기 헤이안시대(平安時代)부터 내려온 염직물 가내수공업이 발달해왔다. 이를 니시진오리(西陣織)라고 한다. 17세기에 최전성기를 맞고,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공업화하면서 전통산업으로 자리 잡아간다. 공장 한 곳마다 3~4명의 종업원을 두는 형태로 정착하게 됐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한국으로 치면 일제식민시기, 가혹한 노동조건 속에서 쟁의가 하나 둘 발생하게 되는데, 이를 주도한 이가 코쿠료 고이치로(国領五一郎)라는 노동자였다.
1921년 스무 살 나이에 노조를 결성하고, 이듬해에 일본공산당에 참여한 뒤, 교토 공산당 조직을 건설한다. 그러다 1928년 특고경찰에 체포돼 전쟁 중인 43년 감옥서 사망했다. 공산당 교토지부는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로 코쿠료를 홈페이지서 소개하고 있다.
즉, 니시진이라는 가장 전통적인 산업에서 벌어진 가혹한 노동조건이, 공산당의 싹(?)을 낳은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물론 니시진을 운영하는 사장들의 조합-니시진오리회관-은 가장 견고한 교토 내 자민당 지지기반이라고 한다).
일본이 전쟁에 패한 1950년대에도 열악한 노동조건은 이어졌다. 의료보험 적용도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고 한다. 열악한 상황임에도 공산당 소속 노동자들은 돈을 모아 대학에서 추방된 의사당원을 돕고자 곳곳에 진료소를 세운다. 좌파 투쟁을 위한 '학습활동'도 니시진 지역에서 활발히 벌어졌다.
결국 이 같은 경험이 확산되면서 교토 시내를 중심으로 공산당 지지세가 공고화됐다는 얘기다. 특히 연령별로 볼 때 노령층일수록 공산당 지지자가 많다는 것도 이를 반영한다고. 교토대 영향보다 니시진 노동자설을 반영하는 근거로 고령층 분석이 유효하다고 이이다 교수는 지적했다. 물론 이 같은 분석은 어디까지나 가설로 추가적인 검증이 필요하다고도 덧붙였다.
일본 내에서 야당이 허약한 건 주지의 사실이지만, 지역에 따라서 틈새시장(?)이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북해도나 토호쿠에서 야당이 강하다든지(북해도도 냉전시기 사회당 지사가 오랜 기간 집권했고, 소선구제하에서 야당 후보가 쉽게 당선되는 몇 안되는 동네다) 하는 등등.
물론 자민당 1당 독재(?)를 넘어설 만한 대안 세력이 부재한 건 틀림없다. 이 블로그에서 오랫동안 지적해왔듯 '일본 시민사회 내에 자생적으로 태어나는 정치력 결여'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일본 정치상황은 한국과 완전히 무관하다 말할 수 없다. 종종 정치 분석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다. 특히 다음 달에 이어지는 전국 지자체 선거(특히 오사카가 관심대상)나 여름 참의원 선거에 관해서도 이슈가 있을 때마다 적어볼까 한다. 관심 있으신 분들의 질문이나 토론 등등 언제나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