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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 Sep 30. 2019

미나마타에서 후쿠시마를 보다

공해병의 비극이 방사능 참사서 반복될 것

'미나마타병'을 들어보신 적 있으실지.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과거 초등학교 때(정확히는 국민학교 시절) 환경오염 관련 비디오를 틀어줬더랬다. 그중에 흑백으로 어딘가에 누워 경련을 일으키는 환자 장면이 등장한다. 미나마타병 환자 영상이었다. 잊힐 법도 한데 여전히 기억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상당한 충격이었던 듯싶다.




미나마타(水俣)시는 일본 구마모토현에 위치해있다. 현 남쪽에 있고 생활권으로는 구마모토보다 가고시마에 가깝다. 바다를 끼고 있는 전형적인 농어촌 마을로 지금은 인구도 2만 명 안팎으로 소형 도시다. 


미나마타역


지난 8월 조사차 미나마타를 다녀왔다. 느낀 바 있어 몇 가지를 적어볼까 한다.


미나마타는 일본의 근대화의 혜택을 입은 도시였다. 별 볼일 없던 곳이 1900년대 칫소(チッソ, 일본질소비료, 질소가 일본어로 칫소)라는 기업이 들어서면서 서서히 발전해간다. 칫소는 구마모토 외에 식민지였던 조선(주로 현재의 북한지역)에도 공장을 여럿 두고 있었고 1940년대는 전시물자를 생산하고 조선인 노동자도 고용했다고 한다(강제노동 가능성도 있겠다).


아래 지도 중간과 오른쪽 지류를 끼고 칫소 공장이 있었고 일부는 지금도 남아있다.



1950년대 안팎, 칫소는 미나마타병 원인이 되는 메틸수은을 바다에 흘려보낸다. 당시 환경오염에 대한 지식이 지금과 같을 리 만무했고 피해에 대해서는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마을의 칫소에 대한 의존은 절대적이었다.


미나마타에서는 서서히 '기병(奇病)'을 앓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몸이 마비되거나 말을 잃거나 급속하게 경련을 일으키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갔다. 희한하게도 사람뿐만 아니라 마을에 돌아다니던 고양이도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 때문에 전염병이란 말이 번졌고 병에 걸린 사람들은 따돌림을 당한다. 가족 모두가 병을 앓는 사례도 있었다.


춤추는 고양이. 출처 : http://gc.sfc.keio.ac.jp/class/2004_14110/slides/02/7.html


1950년대 초중반 칫소공장은 일찌감치 이런저런 실험을 통해 이게 전염병이 아니라 바다 물고기가 원인일 가능성을 특정한다. 하지만 이 사실은 몇 년 뒤 구마모토 의대 실험으로 생선이 원인으로 밝혀지기 전까지 알려지지 않는다. 줄일 수 있던 피해가, 기업의 은폐로 확산돼버린 계기였다. 


구마모토 의대 실험 결과는 명확했다. 


물고기에 농축된 메틸수은이 사람에게 흘러들어 가면서 신경에 큰 병을 일으킨다는 거였다. 이 일로 일본 전역에 큰 파장이 일어난다. 실제로 수십 명이 이미 죽은 상황이었고 몇 명은 생활에 지장이 생길 정도의 장애가 남았다. 완치도 거의 불가능했다.


칫소는 환자들에게 지원금을 줬지만 그렇다고 명확하게 책임을 지지 않는다. 아래는 피해자들의 주장을 담은 미나마타병 자료관 비디오 자료 화면이다. 



피해자들의 바람

- 국가와 현(県)이 책임을 인정했으면 한다
- 미나마타병이라고 분명하게 인정했으면 한다
- 피해자가 구제받을 방법을 생각했으면 한다


한국에 있는 일본 관련 다른 문제 피해자들의 바람과 큰 차이가 없는 내용이다. 


1960년대 이후 피해자들은 단체로 정부와 구마모토현, 칫소를 상대로 소송을 시작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70~80년대 승소 판결이 나오지만, 일본 정부는 끝까지 화해를 거부한다. 90년에는 화해를 거부해온 환경청 국장이 양심의 가책으로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미나마타 정보 자료관 근방 풍경.


아래는 지자체가 만든 자료관과 달리, 민간에서 한 투쟁 자료를 전시해놓은 '미나마타병 센터, 상사사(水俣病センター相思社)'라는 곳 모습이다. 당시 치열하게 투쟁한 피해자들 기록과 칫소의 문제점,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논쟁들을 정리해놨다.

옷에는 '칫소는 가해책임을 다하라!' '전 피해자에게 바로 보상하라!' '지금 바로 피해자로서 인정하라!'라는 구호가 적혀있다. 



거대한 깃발에는 원한(怨恨)의 뜻을 담은 '원'자를 새겨 넣었다. 얼마나 사무쳤는지 알 수 있다.


상사사는 아래 사진처럼 미나마타 지역 언덕 위에 위치해 있다. 걸어가기는 상당히 힘들고 미나마타 자료관 근처서 전동 자전거를 무료로 빌리면 수월하게 갈 수 있다. 


미나마타병과 관련해 일본 정부가 화해한 건 언제일까. 


병이 발생한 지 무려 50년이 지난 1995년이었다. 당시 사회당과 자민당 등이 연립해 만든 무라야마(사회당 출신) 정권이 국가 책임을 인정하고 화해에 나선다. 자민당 쪽에선 당연히 반발이 있었고 사회당은 안보정책에서 양보하는 대신 화해를 이끌어낸다. 오랜 기간 사회당은 미나마타병 환자들을 지원해왔고 긴 시간 끝에 타협을 본 것이다.


당시 미나마타병 증상이 있더라도 지역적으로 경계에 있는 환자들은 지원이 제외됐었다. 이들이 재판을 이끌어왔고, 무라야마 정권의 화해에도 일부는 지원금이 적다는 이유로 2000년대까지 소송을 계속한다. 특별법은 불과 10년 전인 2009년 만들어진다. 일본 정부가 피해자들을 어떻게 대해왔는지 명확히 알 수 있는 사례다.


미나마타병 자료관 내 소송 투쟁 코너


2010년 민주당 정권 하토야마는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미나마타병 환자 위령식에 참가한다. 아래 사진이다. 


미나마타를 둘러보고 미나마타병에 대해 생각하며 느끼는 건 두 가지다. 


하나는 일본 정부가 전후 50년간 자국 피해자조차도 이런 식으로 대해왔다는 점이다. 원폭피해자와 함께 미나마타병 환자들은 자신들의 기나긴 투쟁 속에서도 일부 지원 외에 정식으로 정부의 사과를 받지 못했다. 그게 1995년에야 부분적으로 이뤄진다. 


이런 마당에 한국에 산재해 있는 각종 피해자들의 피해에 응답할 의지나 능력이 있었을까. 의문일 수밖에 없다. 결국 지금과 같은 한일 역사 분쟁이 벌어지는 건 일본 정부, 특히 자민당이 오랜 기간 책임을 회피해온 결과다. 한편으론 무라야마 정권 수준의 사과 이상(무랴아마 담화)의 결과가 나올 수 있을지 회의적으로 느끼게 한다. 


둘째는 미나마타의 비극이 향후 후쿠시마에서 재연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다. 미나마타병 원인이 됐던 수은은 눈에 보이지 않게 생선에 축적돼 적지 않은 사람이 죽고 장애를 입었다. 방사능은 공기뿐만 아니라 토양, 동식물에 들어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고 일본 정부는 무의미한 복구만 외쳐대고 있다. 아마도 방사능으로 인한 증상이 나타나더라도 정부나 관련 기업은 최대한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거기서 또 피해자들의 이중 피해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최근엔 후쿠시마 원전을 소유한 도쿄전력의 경영진에게 무죄판결이 나왔다. 검찰의 불기소 조치에 불복한 시민위원회가 강제로 재판에 넘겼음에도 책임이 전혀 인정되지 않았다. 예측 못할 자연재해에 대비 못했다고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취지였다. 아마도 이 판결은 향후 이어질 후쿠시마 관련 소송의 서막이 아닐까.



점차 일본은 과거의 경험에서 배우지 못하는 사회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좋은 점은 계승해야 하고, 나쁜 점은 극복해야 하건만 현재는 반대로 가는 듯싶다. 미나마타의 비극이 후쿠시마에서 반복될 거란 불길한 느낌을 떨쳐버리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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