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동일본대지진, 그리고 세월호
"Seventy-one years ago, on a bright cloudless morning, death fell from the sky and the world was changed. A flash of light and a wall of fire destroyed a city and demonstrated that mankind possessed the means to destroy itself."
" 71年前、明るく、雲一つない晴れ渡った朝、死が空から降り、世界が変わってしまいました。閃光と炎の壁が都市を破壊し、人類が自らを破滅させる手段を手にしたことを示したのです。"
71년전, 밝고 구름도 없는 쾌청한 아침, 죽음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세상이 바뀌어버렸다. 섬광과 화염의 벽이 도시를 파멸시켜, 인류가 스스로를 파멸시킬 수단을 손에 넣었단 것을 보여줬다.
지난해 5월 있었던 오바마 전 대통령의 '히로시마 연설'이다. 미국 대통령이 현직 신분으로 처음 히로시마를 방문해 한 연설로 일본 내에서 큰 화제가 됐다. 자주 인용되는 부분이 맨 첫 머리, '죽음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는 대목이다.
원자폭탄을 직접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분명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 명문이라고 생각한다. 원자폭탄에 대해 일본이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를 '가해자' 미국이 위로하는 느낌을 강하게 갖게 한다.
일본사회는 1945년 8월 히로시마, 나가사키 이후로 다른 세상이 된다. 일본에서 자주 쓰이는 '전전(戰前)' '전후(戰後)'를 구분짓는 결정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설 연휴 기간 한국에 있으면서, 그동안 미뤄뒀던 <너의 이름은.>(君の名は。)을 봤다. (일본 영화표값이 한국의 1.5배 가량 하는지라, 불가피하게 설 연휴를 기다렸다) 처음엔 시간과 관련된 단순한(?) 학원물인가, 했는데 의외로 나름대로의 의미를 담고 있어 놀랐다.
(되도록이면 스포일러가 되는 내용을 담지 않으려 하나 일부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영화리뷰를 많이 읽지 않은 채라, 일부 겹치는 내용 혹은 '틀린' 내용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나름대로 일본사회의 맥락과 관련해 평가를 해본다.
영화를 보는 도중 떠오른 장면은, 오바마의 위 연설이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죽음, 별다른 삶의 기복없이 살다 갑작스레 죽은 운명들. 일본에서 그려지는 원폭 희생자들이다. 한국에서는 일본이 이른바 '피해자 코스프레' 소재로 악용한다는 비판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안다.
당시 일본제국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을 끝냈다는 '원폭 긍정론'은 별도로, 그저 일상을 보내던 수십만의 사람이 죽은 것도 사실이다. 정부가 식민지 지배와 전쟁을 일으켰다고, 그 책임을 일반 사람이 죽음으로 져야 한다는 건 과도한 얘기라는 지적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한국사회에서는 이 얘기를 어떻게 설득력있게 할 수 있을지가 개인적으로는 과제라 느끼고 있다. 좁힐 수 없는 인식의 갭이랄지.
지난해 일본에서 크라우드펀딩으로 개봉한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히로시마와 일반인의 얘기를 다룬다.
원래는 이 영화를 리뷰할까 했는데, <너의 이름은.>쪽이 좀 더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젊고 순수한' 여성-두 주인공 모두 강한 사투리를 쓴다-이 피해의 대상이자 극복의 주체가 된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통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너의 이름은.>은 일본사회가 가진 '어쩌면 피할 수도 있었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그 두려움을 넘어서기 위한 '연대의식'을 세련된 방식으로 강조한다. 영상미와 음악도 빼어났고, 지나친 신파로 몰아가는 느낌도 없었다.
일본사회에서 원폭 이외에 '어쩌면 피할 수도 있었던' 죽음은 어떤 게 있었을까.
물론, 2011년 3월 11일 일어난 동일본대지진이다.
지진과 쓰나미 자체는 예측할 수 없다. 기껏해야 몇 초전에 겨우 경보를 전하는 수준이다. 전조증상이라는 것도 대체로 명확한 과학적 분석은 결여돼있다. 그럼 뭐가 문제였을까?
동일본대지진의 비극 중, 영화의 모티브가 됐지 싶은 일을 몇 가지 소개한다.
이와테현 리쿠젠타카타(陸前高田)에서는 대해일 경보가 발령되자, 시청 직원들도 피난을 시작했다. 쓰나미가 밀려오기 전, 신속한 경보덕에 피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문제는 피난소로 지정된 장소였다. 대다수 직원들은 건물밖으로 나가기보다 5층 건물인 시청사에 머물렀다. 높이가 높이인 만큼 안전하리라 믿은 것이다.
하지만, 쓰나미는 예상을 넘어 20미터에 달할 정도로 높았고, 5층까지 차들어왔다. 직원의 3분의 1에 가까운 113명이 바닷물에 휩쓸려 숨졌다.
아래 영상은 쓰나미 후의 흔적을 말해준다. 한 순간의 선택이었지만, 옥상이나 시내 산으로 대피한 사람들은 거의 살았다.
다음은, 최근 학교의 책임을 일부 인정한 판결이 나온 '오오카와 초등학교(소학교)大川小学校'사건이다.
미야기현 이시노마키(石巻)에도 쓰나미 경보가 내려진다. 당시 수업중이던 오오카와 초등학교 학생들은 선생님들의 지시에 따라 피난에 나선다.
선택지는 둘 이었다. 학교 근처 뒷산으로 갈지, 제방에 가까운 곳으로 갈지 였는데, 안타깝게도 뒷산으로 가지 않고, 강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려 했다. 바다와 직접 접해있지 않기 때문에 안전하리라 봤던 것이다.
결국 이 선택은 전교생 108명중 74명(10명은 행방불명)이 희생되는 참사를 낳는다. 당시 학교 위치지도는 아래와 같다. 학교 바로 뒤에 있는 산으로 가지 않고, 가까이 보이는 다리를 건너려다 대부분이 물에 휩쓸렸다.
NHK 다큐멘터리 영상이다.
결국 이 일은 학교측의 책임이 인정된다는 판결이 최근 나왔다. 이쯤되면, 어디까지가 인재인지, 천재인지가 불명확하나,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결과를 알았다면, 혹은 선택만 잘했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란 점이다. 자연재해의 비극이 여기에 있다.
<너의 이름은.>을 보면 마지막 피난 안내방송과 경보가 울리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이기도 한데, 이 장면의 모티브는 쓰나미가 몰려 올 때까지 피난방송을 하다 휩쓸린 미나미산리쿠의 젊은 여성이 아닐까 한다. 방송덕에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건졌다.
이 같이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던 순간, 멀리 떨어진 사람들은 그저 바라만 보고(볼 수밖에 없던?) 있던 것도 사실이다. 영화에서는 남자주인공이 도쿄에서 혜성을 바라보는 장면과 관계된다.
영화 내내 강조되는 건 '연대의 끈'이다. 마을이름은 애당초 '이토모리糸守'로, 이토는 실이란 뜻, 모리는 지킨다(마모루)는 한자에서 음을 따왔다. 영화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무스비結び'란 단어 역시 '묶는다'는 뜻이다(끈으로 머리를 묶거나, 팔에 매거나 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동일본대지진 당시 일본에서 중요하게 떠오른 말이 '키즈나(絆)'다.
'馬・犬・たか等をつなぎとめる綱。転じて、断とうにも断ち切れない人の結びつき。'
말, 개, 매 등을 묶어두는 끈. 변하여, 끈으려 해도 끊어낼 수 없는 사람간의 엮임. 즉, 연대의식이다.
시공을 초월해 가진 연대의식이 결국 영화의 주제의식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했다. 영화내내 주제를 명확하게 제시하지만, 촌스럽지 않았다는 점에서 좋았다.
진중권씨가 쓴 '미학 오디세이'에서 무척 인상에 남은 그림이 하나 있다. 아래 그림이다.
에셔라는 판화가가 그린 '연대의 끈'(bond of union)(1956)이란 작품으로, 등장인물은 본인과 아내라고 한다. 절대 풀 수 없는, 심지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를 차용해, 두 사람의 이어짐을 그렸다.
기본적으로 사람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인식이나 생각, 애정의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를 넘어서려는 의지는 중요하고, 그것이 결국 진정한 연대로 이어진다.
<너의 이름은.>에는 혜성이 떨어지고 있음에도, 그냥 제자리에 있으라는 명령을 내리는 사람들이 나온다. 한국인의 시선에서는 당연히 2014년 4월에 있던 일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이 세월호 사고를 만들었고, 여전히 반성하지 않고 있다.
<너의 이름은.>이 일본을 넘어 한국까지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은 여기에 있다.
세월호의 상징이 귀환을 바라는 '노란 리본'이고, 리본은 어딘가에 묶여져, 혹은 매달아져있어야 한다. 영화가 강조하는 연대의식은 단순히 일본인들에게만 머무르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