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크 중독자에게 블라인드 테스트란

맛 만으로는 코카콜라를 구분할 수가 없었다

by 껄룩

논쟁은 흔히 그렇듯 남자들끼리 모인 술자리에서 시작됐다. 소주와 맥주에 질려버린 나머지 주문한 콜라가 하필이면 펩시였던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자칭 코카콜라의 빅 팬인 내가 불만을 터뜨리자 나머지 친구 놈들이 비아냥을 시전했다. 내가 브랜드 마케터로서의 직업정신을 남용하며 브랜딩에 대해 그럴듯한 말만 늘어놓을 뿐, 실제 콜라 맛은 구분도 못할 것이라는 것이 놈들의 주장이었다.


그렇게 그날 술값을 건 죽음의 콜라 블라인드 테스트가 느닷없이 시작되었다. 후다닥 편의점에서 다른 브랜드의 콜라를 사온 친구가 내 눈을 가리고 음료가 담긴 컵을 손에 쥐여준다. 딱 한 모금 만에 느낌이 온다.


이건 사이다잖아.



콜라 블라인드 테스트를 한다고 해놓고 스프라이트 등 사이다를 주면 콜라로 착각하기 쉽다는 트릭을 어디서 주워들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나에게는 통할 리가 없었다. (그 사실을 몰랐더라도 그렇게 레몬 향이 강하게 나는 칠성사이다를 주면 아마 열에 아홉은 알아차릴 테지만...) 뒤이어 이어진 진짜 콜라 블라인드 테스트도 마찬가지로 '싱겁게' 끝났다.


사람들은 흔히 펩시가 코카콜라보다 당도가 높다고 알고 있기 때문에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더 달게 느껴지는 쪽을 펩시로 지목하는 경우가 많다. 펩시의 설탕 함유량이 코카콜라보다 많은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일반인의 미각으로는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정말 근소한 차이일 뿐이다.


대신 코카콜라는 계피와 바닐라 향을 섞은 것 같은 특유의 뒷맛이 더 오래, 강하게 남기 때문에 눈을 가리고 마시면 더 달게 느껴지는 것이다. 펩시는 상대적으로 산도도 더 낮기 때문에 코카콜라와 번갈아 음미하다 보면 싱겁다거나 밍밍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결과는 뒷맛이 더 '싱겁게' 느껴지는 쪽을 펩시로 지목해 정확히 맞춘 나의 승리. 편의점에 다른 종류의 콜라가 없었기에 코카콜라 vs. 펩시만 가려내면 되는 확률 50 대 50의 쉬운 내기이긴 했지만, 사이다를 이용한 친구의 속임수까지 생각하면 꽤 공평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사실 이렇게 맛만 살짝 보고도 그게 코카콜라인지 펩시인지 알아맞힐 수 있을 정도로 내가 콜라를 많이 마신 것은 아니다. 미각이 유달리 뛰어나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가뿐히 내기에서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미리 인터넷의 도움을 받아 각 콜라 브랜드들의 맛 차이를 분석하고 혼자서 셀프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보는 등 준비(?)와 연습(!)을 해 놓았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미각만으로 코카콜라를 구분할 수 없다면 이 정도 노력은 해야 스스로 코카콜라 마니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솔직히 말해 내가 코카콜라를 좋아하는 이유 중에 맛 자체, 즉 바닐라 향이 어쩌고 당도가 어쩌고 하는 것이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한다. 대신 광고와 마케팅적 관점에서 사물들을 바라보기 시작한 순간부터 내 머릿속에 강력하게 각인된 '코카콜라 = 행복'이라는 공식이 압도적인 지분을 차지한다.


이 때문일까. 더운 여름엔 한가득 얼음을 담은 얼음컵에 코카콜라를 담아 벌컥벌컥 마시며 더위가 가시는 순간의 행복감을 만끽한다. 바깥에는 찬바람이 부는 추운 겨울에도 따뜻한 방 안에 앉아 차가운 코카콜라를 마실 때면 행복을 실감한다.


코카콜라는 실제로 1년 내내 마셔도 행복하다는 이미지를 위해 계절 마케팅을 자주 진행한다. ⓒ 코카콜라


바꿔 말하면 코카콜라는 내가 '행복'이란 단어를 연상했을 때 청킹(chunking) 되어 따라오는 이미지들 중에 하나이며, 코카콜라의 맛 자체는 이 과정에 보조적인 역할(달다, 차다, 청량하다 등)을 할 뿐 그 행복의 유일한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언젠가 코카콜라의 마케팅 담당자를 만나게 된다면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코카콜라 브랜드를 행복이라는 키워드와 연관시키려는 당신들의 피땀어린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그 모범사례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나는 앞으로도 나 스스로가 행복해지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코카콜라를 마실 것이다. 그러다 보면 정말 입에 살짝 닿는 것만으로도 코카콜라를 구분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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