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한 자리에서 대화를 시작하는 방법

그저 슬쩍 시간을 확인하기만 하면 된다

by 껄룩

나에게는 초면이거나 친하지 않은 사람과의 어색한 자리에서 대화가 끊겼을 때 써먹을 수 있는 아주 유용한 무기가 하나 있다. 항상 차고 다니는 손목시계로 슬쩍 시간을 확인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상대방은 관심을 보이며 나에게 말을 걸어올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내 손목시계가 눈으로 보는(watch) 것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만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Watch가 아니라 Time Piece다.


브래들리 타임피스는 일반인과 시각장애인이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손목시계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시계의 앞면과 옆면 홈에 박힌 쇠구슬이 자석의 힘에 의해서 움직인다. 옆면 쇠구슬은 시간을, 앞면 쇠구슬은 분을 가리킨다. 손가락을 더듬어 각 쇠구슬이 12개의 입체 시간 눈금 중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를 느끼는 방식으로 시간을 확인한다.

IT로문화읽기6편11.jpg ⓒ 이원코리아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꼭 하는 질문이 있다.


왜 분을 가리키는 쇠구슬이 앞면에 있는 거예요?



보통 아날로그시계를 보면 바늘이 짧은 쪽이 시침, 긴 쪽이 분침이다. 이와는 반대로 브래들리 타임피스는 시계의 중심부에서 더 가까운(짧은) 쪽 쇠구슬이 분을 가리키고, 더 먼(긴) 쪽 쇠구슬이 시간을 가리키기 때문에 처음에는 다소 생소함을 느끼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쇠구슬을 이와 같이 배치한 이유는 위에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브래들리 타임피스가 일반인과 시각장애인 모두를 위한 시계이기 때문이다.


한 시간에도 몇 번씩 보게 되는 스마트폰, PC, TV 화면 속 디지털시계를 통해 우리는 일반적으로 지금이 대략 몇 시 정도인지는 인지하고 있다. 이럴 때 손목시계를 보는 이유는 '지금이 몇 분쯤 되었는지'를 빠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다. 브래들리 타임피스는 분을 가리키는 쇠구슬을 보기 힘든 옆면이 아니라 곁눈질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앞면에 배치함으로써 나처럼 시각이 불편하지 않은 사람도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것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나는 시각이 불편한 사람은 아니다. 시각장애인이 느끼는 고통을 자발적으로 짊어짐으로써 그들을 이해하려는 박애주의자도 아니다. 그런 내가 이 시계를 차고 다니는 이유는 단순하다. 예쁘기 때문이다.


2019-01-12_103534.png ⓒ 이원코리아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물건의 디자인보다는 기능에 더 관심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는 고정관념이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이런 고정관념의 대상이 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디자인에 신경을 쓴다. 설사 그 물건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들 자신은 볼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남이 봤을 때 보기 좋은 멋진 물건을 사용하며 세상의 고정관념과 맞서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시각장애인의 니즈를 충족하기 위해, 또 시각에 문제가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기 위해 브래들리 타임피스는 아름답게 디자인되었다.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세련된 디자인의 나침반을 손목에 차고 다니는 느낌이 든다. 너무나도 빨리 변해가는 트렌드와 최신 기술의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기 쉬운 요즘, 쇠구슬과 자석으로 만들어진 아날로그시계를 나침반 삼아 나만의 길을 걷고 싶다는 의미 부여도 해본다.


그런데 내가 갑자기 너무 설명충이 된 것 같다고? 브랜드로부터 돈을 받고 쓰는 리뷰 같다고?


천만의 말씀. 사람들과 대화가 막힐 때마다 이런 방법을 수없이 써왔기 때문에 레퍼토리를 줄줄 꿰고 있는 것뿐이다.


이 글 처음에 밝혔던 ‘초면이거나 친하지 않은 사람’인 독자 여러분과 내가 지금처럼 서면이 아니라 실제로 얼굴을 맞대고 만난 상황이라면, 손목시계에 대한 이야기로만 최소 10분에서 15분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사이에 얕게는 시계나 브랜드에 대한 취향부터 깊게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견해까지 더 폭넓은 주제로 대화를 확장시킬 수 있는 여지가 무궁무진하다.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이야기가 끊길 정도로 상대방이 대화가 잘 통하지 않거나 무뚝뚝한 사람이라면, 나는 다시 한 번 브래들리 타임피스를 더듬어 시간을 확인할지도 모른다. 단 이번에는 상대방이 보지 못하도록 슬그머니 손을 테이블 밑으로 내린 상태로. '언제까지 이 사람과 여기에 앉아있어야 하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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