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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프쉐어 Mar 21. 2020

고아(Goa)에서의 우정

라이프쉐어 호스트 최재원의 인도 명상 여행기_Part 3

열흘만의 마신 맥주와 황정민 미소


꽉 막힌 공항 도로를 지나 도착한 고아, 아람볼.


깡마르고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백인 히피들이 스쿠터를 털털 몰고 다닌다. 색깔이 강한 가게들이 담뱃갑처럼 오밀조밀 많이도 모여있다. 이 향기.. 익숙하다. 예감이 살짝 찝찝하다. 하지만 예감은 둘째치고 우선 난 빨리 숙소로 가고 싶다. 공항에서 짐을 찾는데 2시간, 택시로 이동 2시간.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나를 어서 숙소에 벌렁 눕히고 싶었다. 



택시기사도 나도 긴가민가하며 찾아간 곳 'Basho huts & cafe' 오쇼의 올드 산야신들이 추천해준 곳이었다. 생각보다 더 허름한 이곳에는 딱히 리셉션이 없었다. 요가하는 백인 여자분들에게 시선을 줘봤지만 별 관심이 없다. 낑낑 거리며 모래밭에 들고 가던 케리어를 그냥 놓아버렸다. 몇 걸음 울타리 안으로 더 들어가자 흰 수염에 마른 인도 남자가 나를 바라본다. 뒤로 강한 태양이 비추어 그의 얼굴은 잠시 보이지 않았다. 잘은 몰라도 그는 내게 다가오는 듯했다. 


"Maybe you don't recognize me" 


환하게 웃는 그는 나를 반기는 듯 손을 내민다.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는 사람 같은데 눈이 잘 안 보인다. 다시 보니 황정민 배우를 닮은 미소에 탄탄하게 마른 몸의 매력적인 훈남 인디언 남자였다.


서서히 시야에 잡히는 그는 2019년 여름 오쇼 리조트의 야외 자쿠지에서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수영을 한 뒤에 자쿠지에서 긴 대화를 나눴는데, 그는 고아에 대한 이야기를 실컷 들려주었다. 


모두가 릴랙스 하고, 언제든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인생 즐기기 좋은 곳. 고아를 한 번도 안 가봤다는 나는 그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기울였었다. 그는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날 것처럼 날 대했다. 그리고 기억으로 그는 고아에서 즐길 클럽과 숙소를 운영한다고 했었다.  


"이봐 친구, 여기가 바로 내가 운영하는 곳이야!"


우연히 프로모션 비디오를 찍어주게 된 고아의 뮤지션들


그는 이빨을 환히 들어내고 웃었다. 이런 우연이 너무 신기했다. 정말 다시 만날 줄이야. 게다가 우리는 서로 같은 인디언 이름을 갖고 있었다. 


"와하하. 너도 Prem이야? 반갑다. 웃기다 야"

"난 오쇼에서 만난 친구들이 추천해줘서 이곳에 온 것뿐인데, 네가 운영하는 곳인지 정말 몰랐어."

"너무 재미있네. 반가워."

"하하. 그래 잘 왔어. 여기 모두 오쇼 산야신들이야. 환영해."



그가 손짓으로 가리킨 곳에서는 넓은 평상에 각양각색으로 늘어져 있는 인디언 남자들이 있었다. 그 뒤로는 저물어 가는 커다란 태양과 고르게 넓디넓게 펼쳐진 해변이 있었다. 긴장감이 한순간에 풀렸다. 


'내가 제대로 왔구나'


고아에 도착해 처음으로 웃었다. 



푸네(Pune)에서는 구경하기 힘들었던 맥주가 이곳에는 얼마든지 있었다. 바로 맥주 한 병을 태양을 안주로 들이켰다. 100루피 위스키는 맥주든 뭐든 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왕창 멋진 노을은 한 움큼 베어 먹고도 하늘에 얼마든 펼쳐져 있었다. 숙소 체크인에 맥주까지 마시니 더 바랄 게 없었다. 해변으로 본격 나가보니 과연 고아의 노을과 바다는 천국 같은 맛이었다. 




익숙한 소외


하지만 바닷가 산책을 한지 얼마 안가 난 익숙한 짜증이 일어났다. 해변 곳곳에는 피어싱, 타투, 수영복 차림에 백인 히피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아프리카 타악기 즉흥 잼이 한창이었고, 사람들이 조금씩 모이고 있었다. 에너지가 보통이 아니었다.




나는 가장 힙해 보이는 바(bar)로 들어가 높은 곳에 올라가 섰다. 아래 해변에는 가끔 보이는 인디언 말고는 죄다 젊은 백인들이었다. 발리 우붓, 창구 해변에서 보고 실망했었던 그 풍경과 비슷했다. 그들은 온 세상이 자기 것인 것 마냥 웃고 떠들고 있었다. 


그 사이를 걷고 있는 나는 익숙한 소외를 느꼈다. 매번 휴양지에 갈 때마다 느꼈던 그 기분. '망할 지구를 재미있게 여행하려면 백인 남자로 태어나거나, 아니면 몸 엄청 좋고 영어를 겁나게 잘해야 한단 말인가!'. 해변에 울려 퍼지는 싸구려 스피커의 소리도 갑자기 거슬렸다. 


아시아 여성은 아주 가끔 유럽 백인 남자와 함께 있고, 아시아 남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한 명을 찾기가 어려웠다. 난 지기 싫다는 이상한 기분에 아까 지나쳤던 타악기 잼 무대 중앙에 섰다. 아까보다도 훨씬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그 안에서 격정적으로 몸을 흔들었다. 



같이 수영하러 들어가지 않을래?


다행히 첫날 느낀 익숙한 짜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바다 산책을 워낙 좋아하는 나로서는 아침에 파도 소리를 들으며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은 꽤 괜찮은 옵션이었다. 자연스레 씻지도 않고 바로 바닷가 산책을 나갔다. 그곳에는 어제 저녁의 파티 피플과 관광객들이 사라지고, 곳곳에서 조용히 명상하고 요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 저기 이쪽으로 와바"


어제 공연을 보다 우연히 몇 마디 나눈 인디언 드러머가 날 알아보고는 불렀다. 사실 그도 거의 남이었다. 지나가다가 비디오 좀 찍어달라고 해서 10분 정도 찍어준 게 다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곳에서 같이 자기 친구들과 인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조금 놀랐지만, 어쨌든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이미 친해 보이는 한 무리였다. 각자 다른 나라에서 왔는데, 인도에 머물 비자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인근 스리랑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친해졌다고 한다. 그때 일행 중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나 지금 바다에 들어갈 껀데, 같이 들어가자."

"응 나? 지금?"

"응 지금 바로. 왜?"

"아.. 아니 너무 갑작스러워서."

"너 만약 지금 바다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많은 걸 놓치게 될 거야. 지금이야. 지금 밖에 없다고."

"음... 그래? 잃으면 안 되지. 그래! 들어가자."


결국 나는 몇 마디를 나누고 완전히 모르는 사람과 바다로 들어가 수영을 했다. 옷도 딱히 없어 그냥 훌렁훌렁 벗고 들어갔다. 물은 아주 따뜻했다. 기분이 한 번에 너무 좋아졌다. 


"너무 좋지?"

"응. 너무 좋아. 물이 참 부드럽다."

"우리에겐 늘 지금 밖에 없어. 이 지구에 우린 잠시 머물다 가는 것뿐이잖아. 마음껏 물에 뛰어 들자구."


지금 이 상황이 이해는 잘 안 됐지만 그냥 재미있었다. 바다 안에서는 한 거구의 인디언 남자가 Chet baker의 I fall in love too easily를 멋진 목소리로 부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의 옆으로 가서 같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러자 그 인도 남자는 깜짝 놀라면서, 아니 이 아람볼 바다에서 쳇 베이커를 아는 남자를 만나다니! 넌 뮤지션이니? 내게 물어왔다. 난 당연히 아니라고 했고, 그저 쳇 베이커를 무척 좋아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미 기분이 좋은 그는 자신에게는 멋진 인디언 재즈, 블루스 뮤지션이 많다며 소개해준다겠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우연은 계속해서 우연을 불러왔다. 


우리는 또 우연히 옆에서 헤엄치던 사람 들고 함께 손을 잡고 바다 안에서 명상을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함께 수영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한국인 여자분이 계셨다. 




내 스피리추얼 이름은 Jade


그녀의 이름은 Jade. 하지만 우리의 한국말 소개는 오래가지 않았다. 


"제 스피리추얼 이름은 Jade에요. 전 영어가 좋아요. 한국어는 너무 포멀 해요. 지킬게 너무 많죠. 그래서 영어가 좋아요. 아까 당신이 이곳으로 산책하며 다가올 때 스스로를 Blessing(축복)하는 게 너무 느껴졌죠. 아름다웠어요."


"우리 이거 같이 할래요?"


그녀는 지나가던 인디언 여인에게 머리를 땋고 있었고, 나도 그녀 옆에서 자연스럽게 머리를 땋고 있었다. 이 따뜻하고도 황당한 시간들이 신기했다. 이제야 왜 사람들이 이곳을 스피리추얼 비치(spiritual beach)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는 손을 잡고, 허그를 하며 자연스럽게 서로를 축복했다. 



이후 Jade 와의 우정은 계속되었다. 그녀가 다른 아티스트들과 함께 사는 공동체에 초대받기도 하고, 함께 공연도 하고, 키우는 작물을 바로 따서 차도 마시고 불에도 구워 먹었다. 그녀는 이미 아람볼과 오랜 사랑에 빠져있었다.


히피들의 마지막 안식처에서 이제 관광지가 되어가고 있는 아람볼은 몇 년 전 쓰레기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고 한다. 그녀는 사랑하는 지구와 아람볼을 위해 관광객이 버린 쓰레기를 치우고, 아티스트들과 같이 clean Arambol 캠페인을 펼치고 있었다. 그녀와 친구들은 대부분 시즌에 따라 아람볼과 리시케쉬를 오가며 살고 있었다. 


이번에 새로 옮긴 집도 집구석구석을 직접 꾸미고, 아지트처럼 만들어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그곳에 처음 온날 내가 길에서 띵샤를 샀다고 말하자, 그녀는 냉큼 같이 공연을 하잖다. 기타 하나 타악기 하나로 아무도 없는 무대에서 우리만의 음악을 즐기며 공연을 했고, 조금씩 그녀의 친구들이 들리면서 관객석까지 온기가 번졌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우리 만의 작은 콘서트를 마치고, 남은 불가에 누워 아람볼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 분명히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내 지난 삶이 아늑하게 느껴졌다. 그만큼 나는 현재에 존재했고, 지금이 좋았다. 눈을 감았다 뜨면 현재가 사라질까 두려워 계속 호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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