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하는 것들의 아름다움
https://www.youtube.com/watch?v=8HlI1syvDqw
세계 어디서나 유명 관광지 주변에 자리한 지역은 억울한 누명을 쓴다. 볼 게 없다는 누명. 우리나라에는 부산 옆에 있는 울산이 그렇고, 인도네시아에는 발리(Bali) 옆에 있는 바뉴왕이(Banyuwangi)가 그렇다. 살면서 바뉴왕이라는 곳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나도 여행 뉴스를 읽기 전까진 이름조차 몰랐던 곳이다. 그리고 사실 모르는 게 당연하다. 인구 2억 7천만의 인도네시아에 있는 인구 10만짜리 도시의 이름까지 우리가 알 필요는 없다. 하필 이 도시에서 단 7km의 좁은 해협만 건너면 나오는 섬이 인도네시아 최고의 관광지이자 다들 나라는 몰라도 이름은 알고 있는 ‘발리’기 때문에 그 그림자에 더욱 가려지는 곳이다.
그런 곳에도 가는 사람이 있다. 이곳에 있는 이젠 화산(Gunung Ijen)은 ‘블루 파이어’라고 부르는, 파란색 불꽃을 내뿜는 화산이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우연히 이곳을 알게 된 후로 이젠 화산은 내 여행의 ‘버킷리스트’로 저장되었고, 세계여행에서 꼭 가보기로 마음먹은 곳이다. 이 작은 도시의 유일한 명소라 그런지 ‘Ijen’ 혹은 ‘Blue fire’의 이름을 내건 숙소가 많았고 그들 모두 이젠 화산 여행 상품을 제공하고 있다. 발리보다 덜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서양인들은 그리 많지 않았고 대부분은 인도네시아 내국인이나 가까운 동남아 사람들, 그리고 극소수의 동아시아인이었다.
그 ‘극소수’에 한국인이 나 말고도 한 명이 더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밤 12시에 숙소로 날 데리러 온 차량은 2시쯤 도착해 즉석에서 팀을 구성했다. 나름대로 여행 경력이 쌓였지만 이렇게 시스템 없이 그냥 모인 대로 팀을 구성하고 가이드를 배정해주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나는 우리 팀의 맨 마지막으로 팀에 합류했다. 가이드가 각자의 이름을 파악하고 마스크를 나눠줬다. 이젠 화산은 유황 가스가 항상 뿜어져 나오기 때문에 마스크로 눈과 코를 가려야 몸에 해롭지 않다고 한다(이름은 마스크지만 방독면과 다를 바 없다). 마스크를 내게 주면서 가이드는 말했다. 저기 저 여자도 한국인이라던데? 너도 한국인 맞지? 가이드가 가리키는 곳에는 검은 모자와 검은 외투, 검은 레깅스를 입고 검은 가방을 멘 여자가 있었다. 새벽이었지만 차림이 온통 검은색인 건 확실했고 그런 차림을 하는 여자는 한국 여자밖에 없다. 다행히 여자는 그런 차림을 하고 있음에도 외국에서 만나는 낯선 한국 남자에게 딱히 적대감과 거리를 두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반가워하지도 않았는데, 나도 오랜 여행으로 피곤했기에 특별히 반가워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오늘 해가 뜨면 각자의 서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을 존재임을 알기에. 우리는 일 년에 한두 번씩 만나는 친구처럼 서로를 대했다. 우리는 서로 이름도 몰랐다.
화산을 올라가는 길은 다소 가파르지만 한국처럼 곳곳에 바위가 없어 위험하지는 않다. 새벽에 출발하기 때문에 머리에 헤드랜턴을 써야 안전하다. 모두의 이마가 하얗게 빛난다. 수백 개의 흰 빛들이 한 줄로 산을 오른다. 그들의 행진을 보면 해가 뜨지 않아도 산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다. 나는 그걸 개미 같다고 느꼈다. 먹을 걸 잘게 쪼개 서로 하나씩 등에 이고 집으로 돌아가는 개미 떼들… 이곳에 있는 모두가 단지 ‘파란 불꽃’ 하나만을 위해 발리의 그림자에 가려진 이곳에서 산을 오르고 있다. 왜? 그저 파란 불꽃이 보고 싶으면 가스레인지 불을 켜면 되는데. 질문에 대한 답은 개미 떼의 행진이 아닌 그 위에 있다. 하늘에는 열대지방 특유의 뭉게구름이 있고 구름 사이로 별이 가득하다. 툭하면 비가 오는 인도네시아에서 오늘은 운이 좋게 비가 오지 않는 날이다. 비가 오지 않으면 이런 시골 마을에서는 은하수로 착각할 법한 별의 그림을 볼 수 있다. 나중에 회상해보면 파란 불꽃보다도 모두가 한 줄로 같은 마음으로 산을 오르던 그 새벽이 더 아름다웠다.
바위는 없지만 꽤 가파르기 때문에 가이드가 직접 이쯤에서 쉬자고 한다. 그러지 않으면 반드시 뒤처지는 이가 나오기 때문이다. 나와 여자가 그랬다. 우리는 팀에서 마지막 두 자리를 꿰차고 있었고, 가이드는 쉴 때마다 아 유 오케이?라며 우리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고산병이 올 고도도 아니고 지형이 힘든 것도 아니라서 숨 몇 번 고르고 나면 다시 올라갈 수 있었다.
여자는 자바(Java)섬의 모든 화산을 올라보고 싶어서 인도네시아로 왔다고 한다. 발리는 이전에도 몇 번 가봤으니 됐고, 한국인들에겐 생소한 수라바야(Surabaya)라는 도시로 입국해 이미 브로모(Bromo) 화산도 올라봤고, 다른 한 곳도 올라봤고(이름이 기억 안 난다), 그리고 지금 이젠을 오르고 있다. 혹시 화산과 관련된 일을 하세요? 아니면 지구과학이라던가.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어리석고 하면 안 됐던 질문. 여행지에서 한국에서의 삶은 아무 의미가 없다. 한국에서의 직업, 지위, 스펙 등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 가장 위협적인 침입자다. 이제는 그걸 알기에 여행지에서 만난 이에게 그런 걸 물어보지 않는다. 여자는 그다지 기분 나빠하지 않으며 그런 학문, 교육과 관련된 일은 전혀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러자 더욱 궁금했다. 도대체 이 여자에겐 무슨 이야기가 있어서 모든 화산을 오르는가?
여자는 연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우리는 절반을 넘게 오르고 나서야 서로의 이름을 교환했다. 온통 검은 옷차림의 연주는 무슨 말을 해도 표정을 알아챌 수 없어 보였다. 어쩌면 그러려고 일부러 검은 복장을 하고 왔을지도. 연주는 화산을 좋아한다. 항상 거대한 물이 고여 있고, 가스가 솔솔 새어 나오고, 그러다 한 번 터지면 뿜어져 나오는 게. 느리게 흐르는 빨간 액체도, 위협적으로 날아오는 검은 돌멩이도, 회색빛으로 모든 걸 덮는 화산재도. 그렇게 한 번씩 터질 수 있어서 화산을 좋아한다. 모든 화산을 올라보고 싶은 건 화산마다 모양이 다르니 그걸 두 눈으로 보고 싶어서 오른다. 사람도 똑같은 이 없고 모두가 다른 것처럼, 화산도 생긴 게 다르고 만약 터지면 폭발의 세기와 유형도 다르니 오를 수 있는 산은 올라보려고 한다.
왜 그리 터지는 걸 좋아해요?
왜냐면… 제가 터지지 못해서요.
그 말을 하는 연주의 얼굴엔 씁쓸함이 맺혀 있었고 나는 별빛 덕분에 그걸 볼 수 있었다.
"저는, 언제나 저를 표현하지 않았어요. 괜히 무안해질까 봐. 의견을 제시하고 그걸 맞춰가는 과정이 서로를 불편하게 만들까 봐. 누가 저를 얕잡아봐도 그 사실을 애써 외면했어요. 그걸 바로잡을 자신이 없어서. 화를 못 내서. 그게 저를 지키는 길인 줄 알았죠. 하지만 아니었어요. 그러는 동안 저는, 연주라는 사람은 사라져가고 있었어요. 난 누구지? 내가 원하는 건 뭐지? 난 뭘 지켜냈지? 밤에 혼자 운 적도 많아요. 옛날에, 인도네시아에서 화산이 터져서 1년 동안 전 세계에 여름이 사라졌던 해가 있었대요. 도대체 얼마나 강하게 폭발해야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걸까… 문득 보고 싶어졌어요. 화산이란 건 어떻게 생긴 건지. 우리나라엔 없잖아요. 여름을 빼앗아버린 그 화산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어요. 당연히 제가 오르는 동안에 터지면 그대로 죽겠지만, 괜찮아요. 그게 어떤 건지 볼 수 있으니까."
나는 처음엔 화산을 전부 오르겠다는 연주를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보통의 젊은 여자는 인도네시아에 오면 발리로 가서 황제 같은 휴식을 즐기지, 여행 인프라가 부족한 발리 외의 지역에서 굳이 힘든 산을 그것도 여러 개를 오르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연주의 고백에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야기 속 연주는 가장 연약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가장 용기 있고 강인한 사람이었다. 방어에만 집중해도 지켜낼 수 없던 자신을 구하기 위해 격렬하게 폭발하는 화산으로 자신을 이끄는 모습에 나는 마음속으로 박수를 절로 칠 수밖에 없었다. 연주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그녀가 오를 때 화산이 활동하지 않아야 하지만, 내심 그녀가 정말로 보고 싶어 하는 화산 폭발을 두 눈으로 보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