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우린 아직 가을 한복판에 있다
https://youtu.be/Cj8QyagyJv4?si=RXQGrACEptzB2yKc
백운봉까지는 1시간 30분 만에 올라왔지만 용문산 등산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용문산의 높이는 1,157m고 백운봉은 941m기 때문에 조금만 더 가면 정상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백운봉 이후부터는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는 V자형 등산코스고 길도 잘 보이지 않아 바위를 잡고 올라가야 하는 경우도 많으며 주변 풍경도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아 지루하기까지 하다. 보통 등산로에는 산악회에서 달아놓은 리본이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어 리본을 따라가면 길 잃을 일은 없지만 여기는 많이 찾지 않는 코스인지 리본을 볼 수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뾰족한 바위를 타는 길밖에 없었다. 당연히 바위는 오르기 편하게 깎여있지 않고 위태롭게 바위의 홈과 주변의 나무를 잡고 올라간다. 내가 잡는 나무마다 가지가 꺾인다. 아이고… 나를 지탱해줄 가지가 없으니 바위에 덩그러니 남은 내가 위험해지기도 했지만 아무 이유 없이 다쳐야 했던 나무에 미안해졌다. 꺾이고 드러난 가지 속을 보며 다짐한다. 너의 희생을 잊지 않고 꼭 정상에 오를게… 부러진 가지를 스틱으로 사용하다 적당한 곳에 눕혀준다. 이렇게 자연으로 돌아가겠지. 험한 암릉을 맨몸으로 넘으며 어쩌면 오늘이 내 마지막 등산이 되지도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인적도 없는 이곳에서 떨어지는 것만큼 개죽음이 있을까?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저 너머로 보이는 가섭봉(용문산의 정상)의 색이 더 진하게 보인다.
단풍은 위에서부터 물든다. 우리는 여름밤 불빛에 몰려드는 하루살이처럼 10월의 산에 몰려든다. 길어봐야 한 달인, 잎의 생존을 위한 파괴 활동에(단풍은 추위로 잎의 엽록소가 파괴되면서 색이 붉어지는 현상이다) 우리는 박수를 보내고, 잔치를 열어 짧은 계절을 즐긴다. 그러나 떨어지는 잎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낙엽의 색은 단풍의 붉음과 대비되는 외로운 연갈색이다. 흙과 비슷한 이 색은 썩어도 알아채기 쉽지 않다. 아무도 축제 이후의 쓸쓸함은 생각하지 않는다. 혹은 외면하거나. 낙엽이 썩어 사라지는 동안 벚나무는 꽃을 피우고 우리는 봄이 왔음을 실감하고 계절을 음미한다. 그러나 금방 떨어지는 벚꽃에 아쉬워하면서도 그 뒤에 맺히는 버찌를 아는 자는 없다. 같은 나무에서 맺히는 버찌는 그냥 버려진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즐길 거 다 즐기기에도 시간은 촉박한데, 언제 그 이면을 생각해요. 그런가… 하산 후 도착한 용문사에서 그럴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식사 시간이 아님에도 가득 찬 손님으로 분주한 식당가, 속세와 한 걸음 떨어진 용문사,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고 오래된 은행나무, 그리고 그걸 보러 온 수많은 어른, 아이들, 강아지들… 모두가 가을을 즐기기에 바쁘다. 이 계절에 겨울을 생각하는 건 가을에 대한 모욕이다.
용문산은 참 골때리는 산이다. 눈앞에 정상이 보이지만 바로 올라가는 길이 안 보이고 봉우리를 빙 둘러서 가야 정상으로 향하는 마지막 계단이 나온다. 정상에 도착해 시계를 확인해보니 정확히 4시간 30분이 걸렸다. 사실 체력이 많이 늘지도 않았고 갈 길이 아직 멀다는 걸 느꼈다. 이제는 어르신들은 웬만하면 제칠 수 있긴 하지만 체력 좋은 젊은이들의 속도는 아직 따라가기 버겁다. 조금 전의 오만한 생각이 부끄러워진다. 생각은 산에 묻고 가고 싶지만 부끄러움까지 묻을 수는 없다. 산에 두고 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쓰레기도, 글감도, 감정도. 처음 올 때의 모습 그대로 돌려줘야 한다. 양평은 산골짜기라 어느 방향을 둘러봐도 산으로 가득하다. 이름 없는 산을 바라보며 글감을 정리하다 날씨가 추워 겉옷을 하나 더 입는다. 조용히 정상의 경치를 감상하고 싶은데 갑자기 한 부부가 말을 건다. 혹시 사진 하나만 찍어주실 수 있나요? 주위엔 나와 그들밖에 없었고, 거절하면 그 좁은 공간에서 뻘쭘함을 서로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아 몇 장 찍어드렸다. 찍어드리고 나는 후드의 모자를 뒤집어썼고, 사진을 확인하시고선 그들은 바로 내려가셨다.
하산을 시작한 시간은 오후 2시쯤이었고 그 시간에도, 반쯤 내려갔을 때도 열심히 올라오는 분들이 몇 있었다. 나는 이른 시간에 산에 가는 걸 좋아한다. 일찍 올라야 기분이 더 상쾌하고, 늦은 시간에 땀에 젖어 찝찝해진 옷을 입고 돌아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고, 샤워 후 편하게 누워 유튜브를 보는 시간이 좀 더 많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일찍 일어나 준비하는 편이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관악산을 갈 때도 웬만하면 아침 8시에는 출발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늦게 올라오는 이들이 게으르거나 잘못됐다는 건 전혀 아니다. 늦게 준비해 올라오는 것도 그들의 속도고, 어떤 속도로 올라도 볼 수 있는 것, 느낄 수 있는 건 똑같기 때문이다. 페루(Peru)의 안데스 산맥에는 69라는 야릇한 이름을 가진 호수가 있다. 이름이 지어진 계기가 참 별거 없는데, 69번째로 발견된 호수라서 69호수란다. 이름은 특이하지만 이곳은 페루 북부의 인기 관광지고 안데스 산맥 트레킹을 체험해보고 싶은 여행객들이 꼭 들르는 곳이다. 나는 마추픽추 같은 유적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자연과 등산에는 관심이 많아서 당연히 투어에 참가했다. 69호수는 해발 4,600m 지점에 있고 우리는 3,800m의 주차장에서 출발한다. 올라가는 높이만 계산하면 북한산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고도가 높기 때문에 평지를 걷는 데도 숨이 찬다. 지형도 특별히 어렵지는 않지만 5km 정도 되는 거리를 3시간이 넘게 걸어갔다. 역시나 나는 그룹에서 제일 늦게 호수에 도착했다. 왜 이곳이 유명한 관광지인지 몸소 증명하는 듯 햇빛에 반사되는 코발트 빛의 호수는 지구가 아닌 듯했고 호수 뒤에 있는 설산은 압도적이었다. 가이드는 가장 마지막에 도착한 나를 보고 그제야 안심하고 나를 반겼다. 69호수는 생각보다 난이도가 높아 참가자의 20% 정도는 중도에 포기한다고 한다. 자신의 그룹에서 낙오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으니 가이드로서 자부심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호수 앞에서 생각했다. 1등으로 도착하나 꼴찌로 도착하나 기다리고 있는 풍경은 똑같다고. 포기하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 건 똑같다고. 뒤늦게 올라오는 이들도 내가 봤던 것과 같은 풍경을 볼 것이다. 산의 정상은 시간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용문사에서 용문역까지는 택시로 2만 원이 나오는 먼 거리다. 한참 산을 오르는 동안에는 돌아가는 길의 택시 비용을 생각하지 않았지만 완전히 내려오자 고민이 되기 시작한다. 어떡하지. 혼자서 2만 원 내기는 싫은데. 나랑 비슷한 처지인 사람이 분명히 있을 테니 같이 타자고 할까? 한 번도 합승해본 적 없는데. 아니면 히치하이킹이라도? 외국에서도 못 해본 걸 여기서 할 수가 있겠냐.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 버스가 10분 내로 도착했다. 일요일 오후 서울로 향하는 기차는 모두 만석이고 난 당연히 새마을호 통로의 계단에 쪼그려 앉아 청량리역으로 향했다. 창밖엔 붉은 해가 뉘엿뉘엿 지고 들판은 노랗게 익어간다. 산은 아직은 초록빛이 더 강하다. 이 계절에만 볼 수 있는 삼색의 조화를 보며 가을이라는 계절에 대해 생각한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어딜 가도 강렬한 색으로 물들고, 옷은 두꺼워지지만 서로의 거리는 조금 더 가까워지는 계절.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계절. 5월이 계절의 여왕이라면 가을은 계절의 왕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10월까지만 가을로 받아주고 11월부터는 춥다는 이유로 겨울로 내몬다. 11월은 죄가 없지만 쓸쓸하다. 바로 직전인 10월은 축제를 독차지하고 일 년 중 가장 화려한 색을 자랑한다. 10월의 한복판에서 가을의 아름다움과 곧 다가올 11월의 울적함을 동시에 생각하다 포기한다. 즐길 거 다 즐기기에도 시간은 촉박한데, 언제 그 이면을 생각해요. 단풍은 빠른 속도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고 빠른 속도로 채도를 잃고 빠른 속도로 떨어진다. 다음 주에는 얼마나 더 붉어지고, 그다음 주에는 얼마나 색을 잃고, 그다음 주에는 얼마나 더 쓸쓸해질까? 그러나 우리는 아직 가을 한복판에 있다. 청량리역에 도착해 기차에서 내리며 이 기차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타고 있었는지 깨닫는다. 그들 모두 같은 생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