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 ①

용문산 단풍 위로 내리는 비

by 제피

https://www.youtube.com/watch?v=Wqv_bpW6iPk

어느새 빗물이 내 발목에 고이고





경기도 양평군에는 ‘용문산’이라는 이름의 산이 있다. 양평에서 가장 높은 산이고, 양평의 중심에 있는 산이자, 양평 시내에서도 한눈에 보이고, 산 이름에서 따온 용문면도 있고, 면 이름에서 따온 용문역이 전철 종점이기도 하는 등 용문산은 양평의 상징이자 자부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전에 쓰던 글을 완성하러 굳이 양평까지 갔을 때 시내에서도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훤히 보이는 저 산이 궁금했고 지도로 찾아보니 저 산이 용문산이란다. 다음 주말에는 저길 가보기로 별 고민 없이 결정했다. 고민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고 굳이 용문산이 아니더라도 그 주말에는 아무 산이라도 갈 게 뻔하기 때문에 지금 생각난 곳을 바로 가는 게 맞다. 아, 고민하다가 달라지는 건 있다. 바로 기차표를 살 수 없다는 것… 서울의 주말 오전은 전국 각지로 떠나는 사람으로 가득하고 양평행 기차 역시 마찬가지다. 전철을 타고 갈까 고민했지만 한 시간 반을 전철 의자에 앉아서 갈 생각을 하니 엉덩이가 벌써 짜릿해서 차라리 무궁화호를 입석으로 타기로 했다. 난 무궁화호 기차 바닥에도 철퍼덕 잘 앉는 사람이라 문제가 되지 않는다(실제로 주말 아침의 기차를 타면 그런 사람이 정말 많다).



양평역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8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역시 시골이라 그런지 공기는 더 상쾌한 느낌이 들었고 더 추웠다. 그런데 한 가지 예상하지 못한 게 있었는데,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졷됐다… 나는 양평도 결국엔 경기도고 서울엔 비가 안 왔으니 여기도 똑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비 오는 날씨를 싫어하는데 비를 맞으면서 산에 오를 바엔 차라리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급하게 머리를 굴려 다른 방안을 생각해본다.


1번: 지금 바로 역으로 돌아가 전철을 탄 후 비가 안 오는 서울의 산으로 간다. 아마 수락산이 제일 가깝겠지? 근데 수락산까지도 1시간이 훨씬 넘게 걸릴 텐데 귀찮다.

2번: 등산은 접고 양평 관광을 하다 집에 간다. 흐리고 비 오는 주말 후레한 추리닝 복장의 남자 한 명이 예쁘게 꾸민 커플들로 가득한 한강이 보이는 카페에서 홀로 커피를 홀짝인다… 검은 백조가 될 바엔 차라리 피시방이나 가고 말지!

3번: 그냥 집에 가자!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소리, 양평에 온다고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준비했는데.

그러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다: 비 맞으면서 올라간다. 바람막이를 챙겨올걸. 등산로 입구로 가는 택시를 타면서 비가 잦아들기만을 바랐다.


20231017_142051[1].jpg 그 주말에는 아무 산이라도 갈 게 뻔하기 때문에 지금 생각난 곳을 바로 가는 게 맞다.



생각해보니 우중 산행 경험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에콰도르(Ecuador)의 코토팍시 화산(Volcán Cotopaxi)을 오를 때 비가 아닌 눈을 맞으며 올라갔던 기억이 있다. 가는 길에는 비가 왔지만 고도가 높아지며 눈으로 바뀌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금방 생각했다. 비가 나은가 눈이 나은가? 처음에는 그래도 눈이 낫다고 생각했다. 비는 옷이나 땅을 바로 적셔 춥고 미끄럽게 만들지만, 눈은 땅에 닿고 얼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기 때문에 금방 오고 갈 우리에겐 눈이 더 괜찮지 않을까… 투어 인원은 12명 정도였는데 나를 제외한 전부가 서양인이었다. 서양인들은 어디서 저렇게 강인한 체력이 나오는지 4,500m가 넘는 고도에서도 쉬지 않고 빠르게 치고 나갔다. 체력이 부족한 헐떡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을 따라잡지 못하자 괜히 그들에게 미운 감정과 열등감이 든다. 나쁜 놈들… 산 하나 없는 곳에 살면서 어딜 가도 산인 한국에 사는 나보다 산을 잘 타? 역시 몸이 건강해야 마음도 건강하다는데, 몸이 힘들면 생각도 점점 꼬인다. 그러나 다행히 나만 뒤처진 게 아니었고 내 또래의 독일 여자와 푸근한 인상의 멕시코 아저씨가 나와 함께했다. 한 명의 낙오자는 비참하지만 둘이면 든든하고 셋이면 우리가 정상인이고 쟤네가 사실 외계인이 아닐지 생각한다. 낙오자 그룹은 10초에 한 번씩 숨을 헐떡이며 멈췄고 우리를 이끄는 가이드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도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이 밖으로 드러났다. 그래도 영원히 올라가기만 하는 산은 없고 모든 산은 끝이 있다. 우리는 이번 투어의 목표인 해발 5,100m 지점의 빙하까지 모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내려가는 길은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예상했듯이 질퍽하고 미끄러웠다. 몇 걸음에 한 번씩 미끄러지고 옷에 내린 눈은 녹지도 않고 바로 얼어붙어 우린 춥고 무거워졌다. 멕시코 아저씨는 여러 번 미끄러지며 말했다. 비나 눈이나 똑같구먼… 우리는 모두 눈에 젖었고 불편했다. 그러고 보니 하늘에서 내리는 건 왜 다 차갑고 불편한 걸까. 우리 눈에서 내리는 건 따뜻하고 포근한데.


캡처.PNG 하늘에서 내리는 건 왜 다 차갑고 불편한 걸까.



다행히 택시에서 내리자 비는 무시해도 될 정도로 약해졌고 땅은 생각보다 덜 젖어 그다지 미끄럽지 않았다. 거침없이 등산을 시작한다. 안내도를 보니 여기서 출발하는 코스가 제일 긴 코스고 정상까지 4시간 30분이 걸린다고 한다. 참나, 4시간 30분이면 지리산도 가겠네. 믿지 않으며 올라간다. 아쉽게도 날씨는 좋지 않아 정상에서도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등산하는 과정 자체가 좋아서 날씨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정상에서의 풍경이 목적이 아니고 산에 올라가는 운동의 과정과 거기서 느끼는 생동감, 그리고 산을 오르는 여러 삶을 보며 글감이나 얻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산을 오른다. 정상에서의 ‘인증샷’은 내게 불필요하다.



산에 오르면서 종종 누군가를 데리고 오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 누군가는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체력이 약한 사람이다. 나는 지금까지 혼자서만 산행을 해왔기에 오직 내 체력에 따라 속도를 조절하곤 했지 타인의 속도에 내가 맞추거나, 타인의 배려를 받아 속도를 유지해본 적이 없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가장 체력이 약한 사람 하면 줄곧 생각나는 사람이 한 명 있는데, 만약 데리고 오면 아마 그 사람은 뒤에서 날 이렇게 부를 것이다. 개새끼… 마치 에콰도르에서 앞서 있는 서양인 무리를 보면서 내뱉었던 것처럼. 그 당시의 나도 지금 이야기하는 그 사람처럼 비실이에 체력(부족)왕이었는데, 한국에 돌아와 꾸준히 등산하다 보니 체력이 조금씩 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멈춰서 쉬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느리더라도 계속 움직이려고 노력하고, 한 번 추월한 상대방이 끝까지 보이지 않는 등 나는 헐떡이를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고백이자 반성이다. 누군가를 산으로 데려오고 싶다는 건 정말로 산행의 재미를 같이 느끼고, 성취감을 같이 누리고 싶은 게 아니라 그저 내 체력이 늘어난 걸 증명하기 위한 실험용 쥐를 데려오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는 한 단계 위로 올라오자 더 위를 바라보는 게 아니고, 내가 속했던 아래 계단을 바라보며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 했다. 그런 마음이 들 때 에콰도르의 낙오 삼총사가 떠올랐다. 셋 중 한 명쯤은 힘을 내 그룹을 빠져나올 수 있었겠지만 우린 그러지 않았고 외계인 농담이나 하면서 함께 올랐다. 그게 불과 일 년 전 이야기다. 일 년 만에 사람이 이렇게 간사하게 변할 수 있구나… 몰려오는 부끄러움을 가득 안고 4시간 반짜리 용문산을 오른다. 산은 때로는 이런 가르침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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