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는 힘에 대해
https://www.youtube.com/watch?v=hmOOkmynj4A
어느덧 정상에 도착했지만, 이젠 화산의 꽃인 파란 불꽃은 칼데라(화산 정상의 함몰 지형, 한라산 백록담을 생각하면 된다)로 내려가야 볼 수 있다. 내려가는 길은 지금까지 왔던 길에 비해 굉장히 위험해 보였다. 우리는 미끄러지지 않도록 서로 의지하며 내려갔다. 호수에 거의 도착할 무렵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면 여기까지 온 모든 게 물거품이 된다. 하지만 여기까지 올라와 버렸는데 비가 오면 어쩌겠나? 인도네시아는 툭하면 비가 내리는 나라다. 우리는 이곳에서 비를 피할 게 아니고 비를 맞으며 여행해야 한다. 유황 냄새가 점점 진해져 마스크를 쓰고 파란 불꽃에 다가갔다. 이젠 화산의 파란 불꽃은 화산에서 나오는 유황 가스가 공기와 만나 발생하는데 밤에만 볼 수 있다. 이 파란 불꽃은 가스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푸른 용암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가 조금씩 내려 기대했던 만큼 활활 타오르진 않았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봤다는 게 중요하니까. 그리고 그보다 더 아름다운 행진과 별과 이야기와 사람을 봤으니까.
연주는 사진을 찍지 않았다. 사진이 필요 없다고 했다. 그러고선 가까이서 좀 더 보고 오라고, 자기는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자 해가 떴고 불꽃은 색을 잃고 회색의 연기로 변했다. 해가 뜨자 터키색의 호수가 눈에 들어왔고, 그 주변에는 노란색 황이 가득하다. 아무 보호 장비가 없는 광부들이 맨손으로 황을 캐고 바구니에 가득 담고 있다. 그들 바로 옆에서는 유황 가스가 맹렬히 퍼지고 있다. 그렇게 황을 캐서 하루에 버는 돈은 고작 7천 원 남짓이다. 그리고 한 구석에서는 황으로 만든 기념품을 팔고 있다. 황을 예쁜 모양의 보석처럼 가공해 팔고 있었다. 가격은 5천 원도 하지 않는다. 고민하다가 결국 사지 않는다. 딱히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한다. 생명을 위협하는 공간에서 어렵게 만들어낸 물건치고는 너무 저렴한 가격에 하나라도 샀어야 했다. 아버지께서는 시골 길거리에서 무언가를 파시는 할머니를 보면 그게 지금 당장 필요 없는 걸지라도 사신다. 집에 마늘이 부족하지 않아도, 시금치가 풍족해도 사셔서 할머니의 손을 덜어드린다(단 서울에선 안 사신다. 서울 길거리는 더럽기 때문). 황으로 만든 조각품 앞에서 아버지와 같은 고민을 했지만, 난 다른 선택을 했다. 연주가 옆에서 거들었다. 왜요, 이거 사고 싶어요? 제가 하나 사드려요? 돈이 부족해서 고민하는 게 아니란 건 알지만요.
인도네시아가 더운 나라라고는 하지만 해발 2,700m의 정상은 꽤 쌀쌀했다. 우리는 다시 정상으로 올라와 화산 폭발로 생긴 호수를 멀리서 구경했다. 호수는 아름다운 터키색이지만 강산성을 띠기 때문에 위험하고, 굳이 바로 옆에서 나오는 유황 가스를 맡으며 구경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호수 감상은 정상에서 하는 게 좋다. 비가 막 그친 후라 하늘은 아직 뿌옇게 안개 비스름한 게 끼었고 그 위로 해가 살며시 보였다. 여기, 생각해보면 진짜 위험해요. 생명을 위협하는 가스가 매일 뿜어져 나오고, 호수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몸에 닿으면 바로 녹아내리고, 이곳 사람들은 저렇게 맨손으로 힘들고 위험하게 일하는데, 한 만 원 벌까요? 도저히 여기가 다른 곳처럼 느껴지지 않아요. 다른 곳 생각해봐요. 도시엔 그곳에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의 삶이 담겨 있고, 자연엔 사람이 아닌 다른 수많은 생명이 살아가죠. 그렇지만 여기는… 도저히 어울리는 표현이 떠오르지 않아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연주는 한참이 지나서야 답했다. 아름다운 것만 보면서 살 수는 없는 법이죠. 그런 것만 보이는 삶이면 참 좋겠는데… 그래도, 오지 않은 것보단 이게 훨씬 더 낫네요.
가이드는 내려가기 전 정상에서 우리 팀원이 모두 있는 걸 확인했다. 여기까지 읽으면 가이드의 역할을 충실히 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할을 다하면 자꾸만 젊은 동양 여자인 연주에게 작업을 거는 듯한 말을 날렸다. 내가 주위에 없을 때를 틈타 은근히 날렸기 때문에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남자가 하는 말은 뻔하기 때문에. 가이드의 열렬한 구애에 질린 연주는 결국 그를 따돌리기로 결심했고, 우리 둘만 덩그러니 남아 내려갔다. 내려가는 동안 연주는 차분하게 그런 남자는 고추를 걷어차야 한다고 말했다. 뭐 그 정도면 폭발하실 줄 아는 거 아니세요? 그렇지만 그놈 앞에서 말을 못 했잖아요. 그냥 얼버무리면서 따돌리기만 성공했지. 더 표현해야 해요. 더 폭발해야 해요. 그래야 지킬 수 있죠. 좀 더…
저는요, 사실 연주 씨를 처음엔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어요. 옷차림도 온통 까맣고, 표정도 드러내지 않고, 인도네시아까지 와서 하는 것도 이상하고, 아무리 세상에 사람 참 많다고 하지만 연주 씨 같은 이상한 여자는 처음 봤어요. 그러자 연주는 힘차게 웃는다. 마치 폭발하는 것처럼. 처음으로 연주의 표정을 봤다.
"저도 재우 씨 이상한 남자인 줄 알았는데요. 그냥 모든 게요. 여길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여행을 7개월째 하고 있는 게, 타지에서 만나는 한국 여자에게 이름도 안 물어보는 게, 이름도 모르면서 하는 일이 뭐냐고 묻는 게, 발리에서 서핑을 안 하실 거라는 게… 근데 서로 이상하게 봤다니까, 그것도 나름 괜찮네요. 이상한 여자와 남자가 화산을 오른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여행지를 간다. 어때요? 그림 나쁘지 않은데요."
해가 뜬 지금은 아무리 검은 모자를 푹 쓰고 있어도 얼굴을 볼 수 있어서인지 우리는 해 뜨기 전보다는 좀 더 밝고 가벼운 이야기를 하며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에는 ‘택시’가 있다. 단 천 원만 내면 들것처럼 생긴 인력거에 앞뒤로 사람이 하나씩 붙어 들고 내려가는 서비스다. 말이 인력거지 바퀴 없이 그냥 들것에 싣고 내려가주는 거다. 우리를 들어줄 노인들은 나는 물론 연주보다도 허약해 보였다. 우리는 고민에 빠졌다. 과연 이걸 타는 게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걸까? 이걸 타면 천 원에 몸이 편하긴커녕 죄책감만 들 것 같았다.
우리는 아침 7시가 되어서야 출발지로 다시 돌아왔다. 팀 배정 시스템이 없던 것과는 반대로 돌아가는 건 숙소의 위치에 따라 차를 배정해줬다. 연주를 귀찮게 굴던 가이드는 보이지 않았고, 우리는 매점 앞 의자에 앉아서 기다렸다. 나는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깜빡 졸았다. 목이 떨어지도록 졸다가 연주가 나를 잠에서 깨웠다. 자기는 이제 갈 시간이라고, 함께 올라줘서 고맙다고, 발리 가서도 조심히 여행하라고, 안녕이라고 말하며 떠났다. 나는 그때 연주의 밝은 얼굴을 정면으로 처음 봤다. 그녀의 얼굴에는 활발히 활동하는 화산 하나가 더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멀어지는 연주의 뒷모습을 보며, 연주가 이야기했던 여름을 빼앗아 간 화산 폭발을 생각했다. 그렇게 강력한 화산 폭발이 가능한 걸까… 그렇지만 역사에 기록된 사실이고 고작 200년 전의 이야기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걸까. 그런 힘이 존재하기는 한 걸까. 생각을 이어가다 모든 화산을 오르려는 연주가 겹쳤고 그 힘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폭발하지 못한다는 연주도, 실은 그 힘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기를 지키는 힘. 살아있게 만드는 힘. 폭발의 원리와 과정은 다르지만, 같은 동력이 있음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