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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young Lee Oct 07. 2019

상상과 표현 사이:  내면의 소리

측두엽의 노래 

혼자 있는 사람 외로워 보이는 그 사람은 과연 외로울까요?  제가 취미로 나가는 남성중창단 단원은 대체로 근육질이고 과묵합니다. 몸집이 좀 되면 울림통이 좋아서 노래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물론 목과 머리가 가까워야 하므로 목이 짧은 사람이 유리합니다. 그래야 머리 공명이 쉽기 때문입니다.  노래하는 사람은 대체로 과묵합니다.  적어고 저의 지인들은 그렇습니다. 말을 많이 하면 소리가 안 좋아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성악가에게 성대는 제일의 자산이기에 가급적 성대를 편안하게 쉬게 해주는 것을 선호합니다. 당연히 말수가 적고 말을 꼭 해야 한다면 꼭 해야 할 말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말을 하더라도 노래하듯이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노래하는 사람은 당연히 감수성이 풍부할 터인데 그 풍부한 감수성을 말 안 하는 침묵으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대원 한 분의 차를 얻어 타고 음식점을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분은 팔뚝 두께가 장난이 아니게 근육질입니다. 그런데 그의 차에서 헬로 키티 얼굴 인형을 발견하고는 매치가 안 되는 상황에 픽하고 웃었습니다.  혹시 대화하는 거 아냐?  동승자가 한마디 하고 피식 웃습니다.  먼길 달리면서 키티 인형에 이런저런 말을 한다고 합니다. 영화에 배구공에 얼굴을 그리고 윌슨이라고 외치던 톰 행크스의 표정이 오버랩되면서 키티와 대화하는 이 남성을 바라봤습니다. 


키티가 되었던 윌슨이 되었던 우리는 혼자 있어도 꾸준히 말을 합니다. 자기와의 대화에 대부분의 시간을 쓰고 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내면에서 울리는 소리를 잡아 글로 표현합니다. 내면의 소리는 이미지 없는 이미지이고 스토리입니다. 내면의 소리가 울려 퍼지면 작가는 글 신이 임했음을 감지합니다. 그리고 열광적으로 글을 토해냅니다. 내면의 소리를 옮겨 적은 노동을 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소리가 울려 퍼지지 않는 날이면 작가들 중에는 그저 숲에 들어가 자연을 바라보거나 친구를 만나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휴식을 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면의 소리가 변덕스럽게 오고 가는 것이 싫은 작가들은 매일매일 일정한 분량의 원고를 채워나가는 글 노동자 행세를 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소설가가 대표적입니다. 하루에 원고자 20장을 채우는 것 그것이 그가 하루를 사는 핵심이고 그것이 끝나면 그는 남은 시간을 흥청망청 소비할 용기를 갖습니다. 


내면의 소리가 과잉이 되어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고호는 고갱과 다툰 후 귀에 들리는 고갱을 살해하라는 소리를 없애려고 귀를 자릅니다. 그에게 이 환청은 그저 혼잣말하는 수준이 아니라 정말 물리적으로 나는 음성을 듣는 사실감이 있었습니다. 시름시름 앓던 고호는 100가지가 넘는 진단을 받았지만 결국은 그가 귀를 자른 후에 그가 간질임을 명확히 진단받습니다. 그는 측두엽 이상이 있던 간질 환자였던 것입니다. 측두엽 이상은 종종 환각과 환청을 던져줍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대표적인 측두엽 이상 간질 환자였습니다. 그는 머릿속이 빽백 하게 내면의 소리로 가득 차서 터질 것 같은 상황에서 토해내듯 글을 썼습니다. 등장하는 무수한 인간이 외치고 싸우고 사랑하는 복잡한 스토리리는 글로 써내는 순간 지워져서 머리가 맑아졌습니다.  위대한 문호의 지독한 글쓰기는 측두엽 이상이 만들어낸 환상을 표현한 것뿐입니다. 


내면의 소리는 종종 양심의 소리로 이해됩니다. 내면의 소리는 종종 자기 자신을 불러내서 다투는 법정의 고소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자기를 들여다보는 자기, 메타인지(meta cognition)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meta는 넘어선 것 혹은  이상의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인지를 넘어서 인지가 메타인지입니다.  우리는 속으로 혼잣말을 합니다. "너 그럼 못써.." "야 그 사람 정말 멋있다." 속의 말을 합니다.  속의 말과 겉의 말이 전혀 다른 사람들도 많습니다.  내면의 소리와 외면의 소리가 일치하는 사람은 투명한 사람이겠죠. 그러나 이것이 많은 차이를 보이는 사람은 속 깊은 사람일 것입니다. 


만파식적이라는 악기는 대나무를 속을 파내서 만든 악기입니다. 대나무에 바람을 불어넣으면 울려나오는 내면의 소리입니다. 기형적으로 속이 두터운 대나무를 채취하고 열을 가해 곧게 펴고, 가운대 구멍을 내는 긴 과정을 통해 비로소 대나무는 소리를 낼 길이 뚫립니다.  우리의 내면의 소리도 우리의 마음의 길을 뚫어낼 때 자연스럽게 울리겠지요.  내면에 길을 내고 음을 낼 구멍자리를 제대로 내는 과정을 통해 내면의 소리는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그저 울리는 꽹과리가 아닌 마음을 흔드는 소리로 충만하여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오히려 수많은 할말로 가득찬 사람되길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CHsZSPrE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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