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잘 한다는 것.
내가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것은 관점전환.
열심히 노력하고 많은 돈을 투자해서 모든 에너지를 공부에 집중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의 많은 학생들이 잘 못되고 부적절한 사고 방식을 고수하게 되는 것이 의아 스럽다.
그렇게 형성 된 사고방식은 직장을 갖게 되고 어른이 되어서도 바뀌거나 개선되는 것 처럼 보이지 않는다.
한 책을 읽었는데, 거기에는 '교과'와 '학과'의 차이를 이야기 하고 있었다.
학교 수업이나 훈련 프로그램의 대부분은 많은 사실과 공식, 숫자들을 기억 속에 계속 저장하는 방식을 택한다.
역사나 예술도 마찬가지다.
누가 언제 주요작품을 만들었는지, 그글은 어떤 기법을 썼는지, 그 당시 어떤일이 일어나고, 몇 년도에 변화가 일어났는지 저장한다.
'교과'는 단지 정보를 축적하는데 있다고 한다.
'학과'는 근본적으로 이것과는 다르다.
학과란, 세상에 대한 일련의 특수한 사고방식을 말한다고 한다.
과학자들은 세상을 관찰하고,가설을 세우고 분류, 실험을 반복적으로 하여 개념, 이론을 추출해 낸다.
그들은 원인을 찾는데 일생을 바치기도 한다.
역사나 미술도 마찬가지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역사적 정보들을 모아 여러방식의 관점을 통해 과거를 재구성한다.
과학처럼 실험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 속으로 들어가 실제의 그곳에 있는 것 처럼 참여를 하고 근거를 만들어 낸다.
그들은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찾고, 상관관계(어느것이 먼저 일어났는지)와 인과관계(어떤 것이 다른 것의 원인이 되는 지)를 혼동하지 않는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획기적인 패러다임을 발견하면 결국 하나의 현상은 무너지기 마련이란 것을 항상 염두해 두고 있다.
이런 전문적 학과의 사고체계는 이전에 이야기 했던 '교과' 즉, 정보습득을 당연히 필요로 할지 모른다.
하지만, 모든 정보의 관련성, 해석하는 방법, 바라보는 관점이 연결지어지지 않는다면 로그인 되지 않은 컴퓨터안의 정보들과 다를 것이 없다.
교과적인 지식은 삶의 현장에 투입되기 힘들다.
단지 정보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학과적 소양이 몸에 셋팅 되어야만 삶과 어우러진다.
그것을 위해서는,
교사(부모)와 학생이 머리를 맞대고 시각의 차이를 팽팽히 대립하며 주장하는 과정을 겪어야 하며, 조언하고 비판하며 자신들 불완전함을 채워 나갈 방안들을 제시해 가며 완벽하진 않지만 가장 합리적인 방향을 찾는 노력을 해 가야 한다.
한 과목에 집중하고 파게 된다면 한 학과에 문을 열게 된다.
한 분야의 학과적 소양을 갖추게 되어 특수한 사고방식을 갖추게 된다면 재미있게도 거의 모든 과목들이 통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의 형식이 다른 형식으로 들어가기 쉽게 한다.
전문적인 소양은 짧은 시간에 이루어 지지 않는다.
어린 아이들에게 좋아하는 것을 찾아 즐겨 보라는 것은 그 첫 입문이다.
한 분야에 문을 열기 시작하여 하나의 사고 형식이 만들어진다면 과목들이 통합되어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 어떤 분야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할까?'가 아니라 '어떤 태도를 선택해야 할까?'로 질문이 달라지기 때문이 다. 과목에 대한 사고형성의 초기단계가 여기서 부터 시작된다.
교과를 통해 정보를 축적해서 학과적 소양을 갖추며 사고방식을 정립해 훈련해 간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
학과적 소양을 통해 제대로 훈련된 사고체계가 부족하다면 슬프게도 내 삶의 시나리오를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게 된다.
훈련되지 않은 사고는 학교를 졸업하도고 사회에 입문하거나 새로운 가족을 형성해 나가는 것에 조차 영향을 미친다.
어떤 각도로 바라보아야 하는지, 어떤 타이밍에 전환이 필요한지, 이 문제를 어떻게 발전 시켜야 할지, 언제 억누르고 유보 해야 하며, 이용해야 할지를 학과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습득하게 되며 이것을 훈련하는 것이 진정한 공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축구같은 운동 종목도 비슷하다.
처음 축구를 할 때는 교과적인 축적이 필요하다.
개인적 기술에 대해 그리고 단체기술과 전략을 위해
개인적인 반복적 학습과 과학적 이론들의 습득이 필요하다.
하지만 강박적이고 건강한 몰입의 경지를 넘어선 교과적 입력만 고집하는 것은 서로간의 연결을 짓거나 실제 경기적용에 실패할지도 모른다.
그라운드에 나가서 다각적인 시각과 피드백을 받아 응용해 보면서 발전시키거나 버리거나 연결지을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한다.
골을 넣어야 하는 경기를 위한 기술의 사용에 있어 나의 신체의 조건들과는 어떤 것이 어울려 유용하고 가치가 있는지, 나의 신체에 영양은 어떻게 작용하는지, 어떤 기술은 축소시키고 버려야 하는지... 나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기도 하고, 넓은 관중석에서 누군가 나를 내려다 보듯이 내려 보는 시각을, 또는 옆 동료가 나를 바라보는 시각을 가져 보기도 하며 다각적인 접근을 해 보아야 한다.
혹, 유럽이나 남미처럼 축구가 발달한 곳에서 만들어진 이론(교과)들을 내가 그들이 된 듯이 관점 전환을 하여 내게 적용시켜 보기도 하여 접목하거나 버리는 과정(학과)을 통해 새로운 또 다른 이론의 문을 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개방적인 마음으로 타인의 관점으로 자신의 관점을 전환시키는 능력은 매우 중요하다.)
축구를 통해(혹은 어느 한 분야를 통해) 나의 사고의 방향이 잘 훈련 어느지점이 된다면 그것은 이제 축구에 국한 되지 않을 것이다.
한 곳의 문을 두드렸는데, 다른 쪽 문들이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다른 학과들과 연결이 되어지고 크게는 삶에 적용되기 시작한다.
문제에 닥쳤을 때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하여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것을 감수하고 어느 부분에 집중해야 할지, 어떤 관점으로 타인과는 어떤 관계를 이뤄가야 할지 결정할 수 있다. 다각적 시각으로 현재의 나를 바라 보며 문제 해결에 대해 전적으로 나를 중심으로 결정하고 책임을 질 수 있다는 것으로 연결된다.
그들은,
병원에 갈 것을, 대통령을 누굴 뽑을 것인가를, 어떤 직업을 선택할 것인가를, 내가 이번 회의에서 어떤 의견을 낼 것인가를, 내가 어떤 연설을 해야 할 것인가를, 내가 어떤 물건을 살 것인지 걸정하는 일을 타인에게 의존 하지 않는다.
남들이 이루어놓은 공식, 이론을 외우듯이 축적하는 것 보다 그들이 이루어 놓은 공식 안에 움직이고 있었을 그들의 사고방식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요즈음 뉴스를 보면서도 계속 한다.
물론 학과과정의 습득으로만 사고의 체계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것이고, 학과공부 만으로 미래가 요구하는 사람을 만들기는 어려운 오늘임은 안다.
초등생 아이를 위해 교과를 축적하는 여러가지 방법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불안해 하는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불편했나보다.
그래서 공부에 대해 포커스를 좁혀 생각해 보았다.
아이가 공부를 제대로 하기 원한다면, 나 먼저 '공부'를 왜 해야 하는 가, 그것이 삶에 적용되게 하기 위해 서는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접근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을 해보고, 공부에 대해 (학과적으로)제대로 공부해 보는 것이 어쩌면 아이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부모의 역할이며, 그 과정을 경험하고 함께 하는 것이 아이에게 '학과'적 소양을 물려 주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방법은 도구이지 절대 움직이지 못 할 쇠사슬이 되어서는 않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