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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공작소 Jul 28. 2016

틀 안에서의 '자유'

권위 있게 제한 두기를 바라는 아이

부모로 부터  자율성에 대해 통제를 받고 자랐던 우리세대는 자녀를 키우는데 있어 과도기적 과정을 겪고 있는 것 처럼 느껴진다.


"여자가, 9시 까지는 집에 들어 와야지"

"공부 못 하면 뭐 먹고 살을래?"

"공부 좀 해라. 공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방 좀 치워라."

"항상 타인을 배려해야 한다"

....


아무리 좋은 가르침도 지시적이고 권위적인 방법으로 사용하면, 아이들 스스로 우러나온 자발적인 책임감있는 행동을 하지 못한다.


아이교육에서 뿌리깊은 신념 중의 하나는 아이에게 책임을 지우면(지시)아이가 자율적이고 책임감있는 사람으로 성장한다고 믿는 것이다.
부모의 권위에 순응하여 복종적이고 순종적이고 말 잘 듣는 아이가 되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외부의 권위가 자신의 행동을 조정해 주기를 기대하는 의존적인 사람이 되기 쉽다.


그래서인지 엄격한 규율과 통제에 지치고 치를 떨었던 우리세대는 아이들에게 자율과 창의적인 사고를 물려주고 싶어한다.


허나,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다.


경험을 통해 배워본 적 없는 우리세대는 아이들에게 자율과 창의성을 기대하며 우리가 받아 왔던 방법의 정 반대로 튀어 버린다.

제제나 통제를 나쁜 것으로 명명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을 아무런 한계없이 놓아두면 창의적이고 책임감있는 사람이 될거라 믿어버렸다.

그런데, 자기자신만을 알고, 자율이 아닌 방종해 가는 아이들을 보며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다.

어디선가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아이가 되려면 부모의 억압이나 지시에서 벗어나 스스로 알아가야 한다고 들은 것 같은데, 이게 맞나 싶어서 아이를 다시 통제하고 지시하다가 오히려 일관성이 결여되어 눈치보는 아이로 만들기도 한다.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 듯하다.


부모, 교사의 역할에 대해 연구하였던 토마스 고든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아이들은 부모가 권위있게 제한 두기를 바란다


아이들은 어느정도 선 까지 받아 들여질 수 있는 한계인지를 미리 알고 싶어 한다. 그래야만 어떤 행동을 할지 안 할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마찬가지이다.


이 이야기는 '부모가, 혹은 선생님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를 미리 알고싶다는 이야기 이지 부모가 내 행동을 제한 하기를 바란다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자율성과 창의성은 건강한 한계안에서 시작되어진 다는 것을 잘 못 이해하는 상황을 종종 보게된다.


아이들은  권위있는 사람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계속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것을 알아야 안심하게되고, 스스로에게서 우러나오는 자율적인 선택과 창의적인 사고가 샘솟기 시작하며, 자신이 결정한 선택과 결과물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가지기 시작한다는것이 간과되는 듯 하다.


아이와 서로 약속된 지점이 있어야 아이들은 그 안에서  안심하고 발전한다.

약속된 사항이 없다는 것은 끊임없이 권위자의 눈치를 보아야 할 것이고, 그것에 온통 에너지를 빼앗기며 소극적이고 소심해 진다.


비슷할지 모르겠지만,

한계를 모른다는 것은 마음껏 즐겁고 창의적이게 그려보라며 건네준 아무것도 없는 하얀도화지를 받아들었을 때의 두려움과 비슷할 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약간의 주제나 방향을 준다면 오히려 그림 그리기가 쉬울 것이다. 주제를 준다고 모든 아이들이 같은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그 주제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는 어떤 것을 그려도 허용받는 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면 점점 더 과감해지고 솔직해지며 여러시도를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계에 대해서 명확히 염두해 두고 싶은 욕구는 어른에게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을 어디서 부터 어디까지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매번 감정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약속된 한계 안에서 아이의 실수나 자유는 지적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성장해 가는지 지켜보아야 할 기준점이 될 수 있다.  

'나는 네가 흰 도화지에 말을 그리기 원했는데,  그리고 나니 내가 좋아하지 않는 꽃을 그렸네'란 소리를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약속된 틀 안에서는  실수도 용납이 되어야 하고, 그 실수야 말로 창의력과 성장의 시발점임을 어른도 느끼고 알아야 한다.

아이 스스로 선택해서 빚어지는 실수라면, 스스로의 책임으로 받아들이고 반성할 것이며, 부모와 만들어진 '약속된 지점'이 언젠가는 '나를 믿어주었던 신뢰의 지점'이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도 보고 느끼고 알아야 한다.


서양인이 한국인을 보면 답답해 하는 부분이 있다.

한국 아이들은 왜 자유롭지 않은가!

한국 아이들은 왜 창의적이지 않은가!

한국 아이들은  왜 실수를 부끄러워하는가!


우리가 흔히 이 이야기를 들으면 처음 이야기 했다시피 너무 권위적이고 통제적이여서 눈치를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틀리지 않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 주변을 봐도 아이들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 관찰된다.

그렇다면 왜 달라지지 않을까.


조금 더 세밀히 들여다 보니, 현재 30~40대는 이에 대해 교육을 통하여 습득은 되어 있지만, 받아본 경험이 없기에 실수와 적용의 반복을 통해 시행착오 중 인것으로 보인다.


외국인들은 몇 백년간 겪어와서 그들것으로 몸에 스며들어 있지만, 유교적 신념이 지배적이던 우리는 다르다.

짧은 기간 교육을 통해 알았지만, 적용하는 것은 책으로 배우는 것과 속도가 다를 것이다.


지시가 싫었던 우리세대는 아이들을 틀 없이 풀어놓아 스스로 배우길 바라며 아이들의 욕구에 맞추기 시작하지만, 결국 나의 신념을 넘어서기 시작하면 꾹꾹 참다가 혼을내고 화를 낸다.

그러니 아이들은 또 눈치를 보게된다.

' 이 정도 하면 괜찮나? 이 정도 하면 엄마는 화를 내지 않을까? 이런 실수해도 선생님한테 혼나지 않을까?'

아이도 아이지만 어른들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오히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아이들이 즐겁고 행복하도록 방법을 달리 쓰며 노력했는데, 어째 아이들이 바뀌는 것 같지는 않고 부모는 잔뜩 화만 나서 참는 상황이 벌어진다.


링크는  우리나라에 대표팀 감독으로 온 슈틸리케의 조언이다.

                  '실수를 잘해야 축구를 잘할 수 있다'


이 이야기를 읽고 여기저기 떠 돌아다니는 축구선수 부모님들이 하는 이야기가 떠 올랐다.

'아이들은 전술이나 전략에 길들여지면 창의성이 떨어져요. 자유롭고 즐겁게 즐기게 두어야 창의적이죠.'


물론 전술이나 전략을 예전의 리모콘씩 움직임으로 묶어두면 곤란하긴 하다.

배우는 시기에 전술이나 전략은 내가 수행 해야 할 플레이에 대한 약속에 대한 목표(한계)다.


약속이 되었다는 것은 안정감을 주는 것이고,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또한 내 활동이나 플레이에 대해 눈치를 보지 않고 에너지를 소모 하지 않으며 충분히 자기 경험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의미한다.

 

또,  배움의 방향점이며,  만일 그 약속이 충분히 지켜지고  멋지게 이루어 냈다면 성취감을 획득할 것이고 그 성취감은 자기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갖게 할 것 이다.

그것이 재미이고 즐거움이다.

약속된 사항에 대해 도전하고 두드리고 접근하며, 또 서로를 믿는 신뢰를 통해 '우리'라는 끈끈함도 생긴다.


어릴적 권위자의 한계를 알고, 그 안에서 자신 스스로 선택 할 수 있는 자율성과 실수에 대한 반성을 통해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을 얻은 아이는, 성장해 가며 어른이 지정해 준 한계에 대해 도전하기 시작한다.  그 한계 조차 완벽하지 않은 체계였음을 인지하기 시작하면 그 아이에겐 타인이 주는 한계가 힘을잃기 시작한다.

스스로 자신의 목표를 설정하고 부족하거나 오류를 느낀다면 무너뜨리고 다시 설정하는 것을 반복하기 시작 할 것이다.  

이것이 흔히들 이야기하는 멘탈, 정신력의 밑바침이다.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목표설정과 태도를 다시 정립해가며 스스로 만든 목표를 향해 다시 도전하는 사람은 외부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는다. 타인의 칭찬에 춤추지도 않으며 비난에 크게 좌절하지도 않는다.


나는 현재 어른들의 시행착오가 한편으로는 반갑게 보이기도 한다.


실수를 반성하고 수정하여 다시  도전하는 태도를 가지기만 한다면, 우리 또한 그것을 통해 발전하는 어른이 될 것 임을 알기 때문이다.


슈틸리케의 이야기를 직접 듣지 못한것이 아쉽긴하지만, 그의 평가에 대해 '우리가 잘 못 하고 있네'라는 비난으로 가져와서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시 예전의 우리 모습을 끌어다가 발전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모습으로 낙인을 찍는 것 같아 불편하다.


기자가 쓴 글 중에 ' '틀'안에 넣고 창의적이지 다고 다그치는 것이 답답하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바꾸고 싶다.


'아이들은 틀(한계)을 원한다. 그 한계를 알아야 안전함을 느끼고 나의 선택에 자유로울 수 있으며 자율적인 태도 안에서 창의력이 발현된다.

틀 안에서의 실수는 자율적인 선택으로 보아야 할 부분이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 가는지 지켜보아야 하며, 훌륭히 수행하는 모습에는 아낌없는 격려를 해 주어야 할 일이다.'라고.

자칫 잘 못 생각하면 틀이 없어져야 창의성이 생기는 것으로 가져가기 쉽다.

창의성은 틀의 유무가 아니라, 오히려 '신뢰'의 문제에 가깝다.  


우리는 아이들의 자율성, 책임감, 창의성에 대해 관심이 지대하다.

고무적인 것은 보여지는 것은 예전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같이보여도, 어른들도 배우고  잘 못된 것을 인지하고 반성하며 또 다시 도전을 향하는, 이루어 나아 가는 과정 가운데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 어른 조차 실수를 통해 발전하고 성장하고 있는 중이라는 이야기이며, 발전을 위한 실수가 성장통의 한 부분이라는 것은 아이나 어른이나 마찬가지이다.

아이와 어른은 같이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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