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앞 뒤가 맞지 않잖아. 거짓말이야.
서로 딱 맞지 않아 삐거덕 거리는 대문을 힘겹게 들어올 리 듯이 연다.
작은 몸으로는 철문 무게가 버겁지만 정강이가 문 하단에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 내 발의 무게는 경쾌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언덕배기에 자리 잡고 앉았다.
문을 열면 오른쪽은 얼굴을 들어 보아야 언덕 꼭대기가 보였고 왼쪽으로 보면 내리막길 끝 쌩쌩 달리는 차들이 간간이 보이는 차로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 차로가 만나는 길 오른쪽으로 돌면 작은 유리집이 있다.
거기엔 나보다 서너 살 위였던 수연이 언니가 살고 있었다.
"언니, 나는 오늘 꿈을 꾸었어. 내가 막 뛰었거든. 그랬더니 ..."
"거짓말, 니 꿈 이야기는 앞뒤가 맞질 않잖아. 거짓말이야"
나는 그때 앞뒤가 맞질 않다는 표현을 처음 들었다.
"앞뒤가 맞아!"
뭔지 모르겠지만 맞지 않는 건 싫었다. 우기고 봐야겠다.
얘기도 제대로 시작하지 않았는데 앞뒤가 맞지 않다니, 뭔가 억울했다.
"몰라, 나 너랑 안 놀아. 얘들아 가자~"
수연이 언니는 우르르 애들을 몰고 노을이 내리는 어스름한 저녁 저편 끝으로 사라져 버렸다.
"엄마, 우리 유리 깨져도 수연이 언니네서 사지 마."
"왜?"
" 그 집 유리 싸구려야. 내가 저번에 봤는데 아저씨 유리 칼이 낡았어. 그래서 싸구려야."
말도 안 되는 억지가 그때의 엄마는 어떻게 들렸을까.
요즘 이상하게 어린 시절이 영화 필름같이 떠오른다.
죽을 때가 된 걸까.
남들 이야기로 죽기 전에 자신의 인생이 필름처럼 좌르륵~하고 지나간다던데...
쫌 쫄린다.
수연이 언니는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 첫 만남에서 초등.. 아니 국민학교 3학년까지 함께 했었는데.
우리 동네에서 그 언니네 집에 유일하게 전화기가 있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진짜 옛날 사람 같다.
아마 우리 집엔 내가 4학년 정도에 세련된 미색( 크림색. 그땐 그렇게 말했다.) 전화기가 들어왔을게다.
왜냐면 국민학교 3학년 때 내가 엄마에게 빨래 방망이로 맞을 때 그땐 전화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거짓말을 잘했다.
위의 꿈 이야기도 사실은 지어내며 말하고 있었는데 수연 언니가 앞뒤가 맞지 않다는 말에 들켰을까 화들짝 놀랐던 것.
엄마랑 나는 마당 한편 시멘트로 잘 발라 매끈매끈한 수돗가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재연 엄마, 전화받아"
낮은 담장 너머로 수연 언니 엄마 목소리가 넘어왔다.
빨래 방망이로 청바지를 치고 있던 엄마가 나간 수돗가에서 나는 바짓가랑이를 올리고 발가락 끝으로 수도꼭지를 막았다 놓았다 장난을 치고 있었다.
바지가 다 젖어 엄마한테 혼나는 게 아닐까 생각하던 찰나 삐거덕 거리는 철제 대문이 와르르 무섭게 열렸다.
내 숨소리가 그렇게 큰지 몰랐다.
"과외를 안 가? 과외를 안 간 것도 그런데 너 뭐가 되려고 그런 거짓말을 해? 예비군 훈련? 선생님이 예비군 훈련을 갔어? 예비군 훈련이란 말은 어떻게 알았어? 너 사기꾼 될래?"
청바지를 때리 던 빨래 방망이가 내 엉덩이랑 허벅지를 사정 없이 내리쳤다. 내 몸에 닿을 때마다 내 숨소리가 엄청 커졌다.
엄마 눈이 무서웠다.
내 엉덩이가 아픈 거보다 엄마가 저렇게 화 내다가 또 아프고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엄마 눈이 예전에 아팠을 때처럼 가늘고 얇게 파르르 떨리는지 쳐다봤다.
"얘 좀 봐. 잘 못했단 말은 안 하고 엄마 눈을 똑바로 쳐다봐? 내가 어쩌다 너 같은 딸을..."
당시엔 담임선생님이 과외도 하실 수 있었다.
우리 담임선생님은 남자였는데 이름도 아직 생생하다.
3학년 15반 한진* 선생님.
아마도 그날 나는 과외가 하기 싫었나 보다. 아니 실은 과외를 원래 하기 싫었던 것도 같다.
뭔가 하기 싫으면, 나는 천재가 되곤 했다.
'예비군 훈련'
내 또래 국민학교 3학년이면 거의 모를 그 단어를 나는 알아냈다.
우리 반 선생님은 때때로 예비군 훈련을 갔고 나는 그것이 무언지 모르지만 그 시절 그 또래 남자들에겐 중요한 일이란걸, 그 이야기를 하면 우리 엄마도 다 이해하고 더 이상 묻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몰랐던 건 학교에는 전화기가 있고, 우리 엄마는 수연이 언니네 집에 전화기 사용료를 얼마씩 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내가 사기꾼이 될까 무서웠고 자꾸 거짓말을 해서 엄마에게 미안했다.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자꾸 소설 같은 생각들이 비집고 나오곤 했다.
'그 생각들은 나쁜 걸까? 그 생각들이 나를 잡아먹으면 어떡하지?'
엊그제 설거지 하는데 아무렇지 않게 친구에게 작은 거짓말을 하는 아들녀석의 목소리와 함께 나의 시간이 거꾸로 타고 내려갔다.
약간은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애잔한 무언가가 가슴 어딘가에 꾸욱하고 눌려진다.
이제 오십이 된 내가 3학년이었던 나에게 이야기를 건네본다.
"괜찮아, 너 사기꾼 안 돼.
가끔은 여전히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소설 같은 생각들을 하곤 하지만 그건 그냥 내가 더 재밌게 세상을 잘 살고 싶은 소망 같은, 그런 바램들을 품는 거더라고. 그리고 엄마도 건강히 엄마의 세상을 잘 살고 계셔. 네가 걱정하는 그런 일들은 삶을 살다 보면 만나게 되는 자연스러운 마디마디의 숙제 같은 거야. 감당할 수 없는 숙제는 없더라. 3학년 그 시간, 그때도 여전히 너는 잘 살아내려고 했구나. 걱정하고 고민하던 3학년 그 나이의 마음을 생각하니 이쁘기도 아리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