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돈이 있어야 여행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준비기간이 짧았던 탓에 잔고는 일찍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임시방편으로 필리핀에서 숙식을 해결해 줄 곳을 구했다. 마닐라에 위치한 C** International Language School(이하, "어학원")에서 Assistant Student Coordinator로 일을 하게 된 것인데, 그 곳에선 흔히 '학생 매니저'라고 불렸다.
급여를 받지는 않았지만 하루 4시간 오피스 업무를 하는 조건으로, 숙식과 하루 4시간의 영어수업이 약속되었다. (그렇다. 돌이켜보니 계약을 하고 간건 아니고, 약속을 하고 갔다. 약속을...;;)
공항에 도착하니 같이 일을 하게될 한국인 동료 Thorne이 드라이버와 함께 마중나와 있었다.
Thorne은 영어이름을 참 어렵게도 지어놨다. Th발음도 모자라 rn발음도 해줘야된다. 그냥 사람들이 자기를 안불러주길 바라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항공 스케쥴이 애매해 둘 다 점심을 못 먹은 터라 공항에 있는 버거킹에서 햄버거를 먹기로 했다. Thorne이 계산을 했는데 어학원에서 사주는 거라고 했다.
점심을 먹는 중에도 Thorne은 어딘가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를 계속 받아야 했다. 통화가 길어지면서 둘의 언성이 높아졌고, 수화기 너머로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료의 통화가 어서 끝나길 기다리며, 나는 빌고 또 빌었다.
(신이시여... 부디 저 수화기 너머의 남자가, 제가 매일 마주하게될 상사는 아니기를 간곡히 빕니다.)
마침내, Thorne은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분을 삭이지 못 한채 나에게 말했다.
하... 이실장
ㅇㅅㄲ ㅈㄴ ㄸㄹㅇ ㅅㄲ야...
하...ㅠ
그렇게 필리핀 라이프가 시작됐다.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