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이름 없는 남자』
아이를 출산하고 몇 주 되지 않았을 때 이런 메모를 휘갈겨 놓은 적이 있다.
“어느 날, 일상에서 강제 로그아웃 당했다.”
아홉 달을 품고 내 배 아파 낳았으면서도, 나는 마치 아기가 어느 날 갑자기 뚝하고 떨어진 것처럼 느꼈다. 삶에 아기가 잔잔하게 스며드는 상상을 했던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자신은 결코 그런 존재가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갓난아기’는 매일 소란스럽게 울어댔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작은 생명체가 문을 쾅쾅 두드리며 내 삶 안으로 밀고 들어온 후, 나는 계절이 흐르는 줄도 모른 채 멈춘 시간 속을 살았다. 그림책 『이름 없는 남자』의 주인공이 어느 날 갑자기 베일리의 트럭 앞에 '쿵' 하고 나타나, 멈춘 계절을 함께 살아간 것처럼.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 남자는, 마치 갓난아기처럼 모든 것이 처음인 듯하다. 국자를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인 양 신기하게 바라보는 남자의 눈동자에서, 첫 세상을 읽어 내려가던 내 아기의 눈동자를 발견한다.
남자가 머무는 동안, 베일리의 집 주변은 계절이 멈춘 듯 보인다. 그러나 그 시간 속에서 대지는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익어가고 있다. 어느 날, 무언가를 깨달은 듯 홀연히 사라진 남자가 ’ 내년 가을에 또 만나자 ‘는 메시지를 남겼을 때, 베일리는 알았을 것이다. 낯선 존재가 머물다 간 빈자리는 상실이 아닌 깊어진 삶의 농도임을.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될 즈음, 내 아이도 붉게 물든 나무 사이로 힘차게 달려갈 것이다. 그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가 ‘젊음’을 손에 쥐고 새로운 계절을 향해 뛰어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 뒤에 남은 나의 ‘저무는 계절’에 대해서도. 내가 뛰어들었던 계절 뒤에도 누군가의 저무는 시간이 있었음을, ‘젊음’을 손에 쥐었을 땐 보이지 않던 것들을 되짚어 보려 뒤를 돌아본다. 저무는 계절에 뒤를 돌아보는 것은 후회나 미련이 아니다. 내가 쉼 없이 뛰어가는 동안 내 뒤에 있었을 존재를 헤아리는 마음이다. 앞만 보든, 돌아보든 각자의 계절은 그렇게 흘러간다.
어느 날 아이와 차를 타고 가는데 아이가 말한다. “엄마 저기 까만 새가 있어.” 아이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지만 새는 저만치 날아간 뒤다.
엄마는 미처 보지 못했다고 답하자 아이가 말한다.
어떤 날이 되면 엄마한테도 새가 날아올 거야.
아이는 가끔 이렇게 시인 같은 말을 한다.
‘맞아. 엄마의 새는 또 다른 모양을 하고, 또 다른 색을 띠고 엄마의 창문으로 날아올 거야. 어떤 날이 되면.’
어떤 날,
돌연히 날아올 그 새를, 그 계절을
엄마는 기꺼이 받아들일 테니
너는 ‘젊음’을 손에 꼭 쥐고 너의 계절을 향해 달려가길 바란다.
『이름 없는 남자』ㅣ 크리스 반 알스버그 ㅣ 비룡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