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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국 Aug 26. 2023

살아남는 놈이 강한 거라 던데요

동물의 왕

동물의 왕



고등학생 시절, 뿅망치로 정글의 동물과 싸우던 꿈을 꾸고... 미술 학원에서 이 그림을 그렸다. 

뭐든 디지털로 그리는 지금과는 다르게 나의 2010년대는 아날로그의 시대였다. 

두꺼운 프랑스산 종이 위에 수채화로 그리는 것이 내 그림의 전부였는데, 

아쉽게도 그때의 아날로그 그림들은 전부 분실하고 수중에 한 장도 남아있지 않다. 

일기장은 이제껏 잘도 간직했으면서 그림은 단 한 점도 없다니. 


다행히 디지털카메라로 찍어뒀던 이 그림 파일을 우연하게 발견했다. 

수평이 하나도 안 맞는 게 참 대충도 찍었더랬다. 

어떻게 수정해 볼 방법이 없나 살펴보다가... 

포토샵으로 대대적인 리터치를 하고 나서야 그나마 좀 볼만했다. 

과거와 현재의 적절한 콜라보였다. 


마치 일기장과 같은 이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이걸 그렸던 학생 때가 떠올랐다. 

참 후회 되는 게 많더라.

무작정 열심히 하기보다는 정말 필요한 공부가 뭔지 알아봤더라면, 

마냥 그림 그리는 직업을 갖고 싶다기보다는 

정확히 어떤 그림을 그리는 어떤 직업을 갖고 싶은지 더 고민했더라면, 

나중에 어떻게 쓰일지 모르니 열심히 그린 그림을 잘 좀 모아뒀더라면 하고 말이다.

그땐 왜 그렇게 똑 부러지지 못했고 왜 그렇게 주먹구구식이었는지... 

바보처럼 구부정하게 앉아서 눈앞에 있는 프랑스산 종이에만 집중했던 내 모습이 생각난다.


아마 스스로를 그런 사람이라고 믿었는지 모르겠다.

앞으로도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 

매번 더 나은 '다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 

그러니 이미 그린 그림에는 별 생각이 없었겠지. 

다음번 그림이 분명 더 멋질 테니까. 

나는 분명 계속 그림을 그리며 살 테니까.

그런데 어쩌나... 미안하게도 아직 그런 사람이 되어 주지 못했다.


학생 때의 나. 미련했던 그때의 나. 나는 항상 종이 위에 그림을 그렸다.

미련하게 밤늦게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어떤 그림을 그려야 입시에 유리하고, 

무엇이 포트폴리오에 필요한 그림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내가 가장 그리고 싶은 그림, 

앞으로도 계속 그리고 싶은 그런 그림을 그렸다. 

학교나 회사에서는 원하는 포트폴리오가 있기 마련인데 어떻게 그렇게 대책 없이 행동할 수 있었을까. 

그냥 내가 잘 그릴 수 있는 그림을 그린다라...

우습게도 그땐 낭만이 있었던 것 같다. 

그저 내가 잘하는 걸 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항상 시간에 쫓기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느리고 꼼꼼한 손길로 나의 그림을 그렸다. 

그림에 진심을 담았던, 내 것을 그렸던 유일한 시간이었다. 

 

지금의 내가 이렇게 그리기는 힘들 것 같다. 

동물 털을 한 올 한 올... 주름을 한 땀 한 땀 그리지 않겠지. 

포토샵으로 좀 더 간략하게, 손쉽게 그릴 방법을 모색할 테지.

보다 보니 참 웃기다. 색약 주제에 색도 과감하게 쓰고 망설인 느낌도 전혀 없다. 

붓이 지나간 자리에서 괜한 자신감 마저 느껴진다. 

내  그림 스타일이 어떤지 스스로는 아니까 더 잘 느껴졌다. 

그때 정말 애정을 갖고 이 그림을 그렸구나. 

어떻게든 빠르고 효율적으로 그리려는 지금의 나보다, 

틀린 색을 쓸까 봐 흑백으로만 그리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멋지다.

그래, 그때의 나는 색을 틀리든 어쩌든 두려워하질 않은 것 같다. 

내가 그린 그림이 세상에서 제일 재밌고 다음엔 더 죽여주는 그림을 그릴게 분명하다 믿었으니까.


어쩌면 고등학생 때의 나는 마냥 미련했던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그 시간을 지내왔던 걸지도 모르겠다.

지금 와서야... 그걸 했었어야지, 저걸 하지 말았어야지 말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던 그때의 나는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것들을 손에 쥐고서 최선을 다 했던 것 같다. 

앞으로도 그림을 그릴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믿어주면서.


아마 훗날, 미래의 나 역시 지금의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겠지. 

거 좀 효율적으로 좀 공부하지 미련하게 그런 식으로 했냐며 말이다.

하지만 10시간 동안 트럭을 몰고 가정을 돌보다가,

짬을 내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던 오늘 밤을 떠올리고 나면... 

'아니다, 그때 진짜 열심히 살았다'라고 생각을 고쳐먹어 주길 바라본다.


색약 판정을 받고 나서도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던 고등학생 때의 나도 그렇고,

번번이 공모전에 떨어지면서도 다음엔 꼭 죽여주는 글을 써 주겠다며 버티는 지금의 나도 그렇고...

결국 미련해 보이지만 그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잘 지내고 있는 거라 생각한다.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놈이 강한 거라는 영화 속 명대사처럼, 

아직까지는 나도 그럭저럭 살아남아있으니까 말이다.

아직 펜을 놓지 않았으니까,

잘하고 있는 거다.


그래, 맞다. 

그 옛날 꿈속에서 뿅망치 하나로 동물들을 두들겨 팰 때, 

내게 다른 무기는 필요하지 않았다. 뿅망치 하나면 됐었다. 

나도 펜 하나만 있으면 된다.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내 손엔 펜이 들려있다.

나는 꽤 강한 걸 수도 있다.



-동물의 왕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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