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홍수
원대한 꿈을 꾸는 만큼 그 여정이 굉장히 길 거라 생각했다.
여정이 긴 만큼 주어진 시간도 많고
그만큼 해야 할 것도 많겠다고 생각했다.
매일 글을 쓰는 거야 당연하고
좋은 글이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책도 많이 읽어야 했다.
상상력의 원료가 될 자료 수집도 틈틈이 해줘야 했고
내 시나리오가 영화로 발전될 수 없을 수도 있으니
손 놓았던 그림을 다시 그리며 직접 만화로 발전시킬 시간도 필요했다.
본격적으로 그리기 위해 커다란 컴퓨터 장비들을 샀다.
이동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기 위해 태블릿 장비도 샀다.
배경을 쉽게 그릴 수 있다는 말에 여름 내내 컴퓨터 프로그램을 배웠고
그래도 모든 영감은 연필로 쓸 때 나온다는 유명한 감독의 말에 작은 필기대도 샀다.
많은 시간과 비용이 여기저기에 투자 됐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성경 말씀처럼
나를 위해 준비했던 이것들에게 점점 얽매이기 시작했다.
여가 시간이 생기면 무조건 서재에 들어가 작업을 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프로그램을 돌리거나 책을 읽었다.
그럼에도 언제나 부족함을 느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매일 같이 서재에서 같은 루틴을 반복하더라도
빚에 시달리는 채무자처럼 해야 할 일들을 쫓아다니기 바빴다.
그림을 열심히 그리다 보니...
데이터 수집을 안 한 지는 1주일이 넘어갔고
글을 안 쓴 지는 5일이 됐고
배경 제작 프로그램에 손을 안 댄 지 열흘이 넘어가면서 다 까먹을 것만 같았다.
나는 매일 서재에서 영화와 줄다리기를 하는데
당길수록 더욱 끌려가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더욱 조급해져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떠한 계기로...
삶을 단순하게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내가 너무 잘하려고만 애썼다.
멋진 영화와 작품들로 길들여졌던 그 눈으로
이제 시작하는 스스로를 판단한다는 것은 웃긴 일이었다.
나는 내가 봐왔던 작품만큼 잘할 수 없었다.
내가 당장 해야 할 일은 명작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걸레짝이라도 좋으니 완성해 내는 것이었다.
당연한 것을 이제 깨달았다.
지금까지의 애처로운 노력은...
더 이상 실패하고 싶지 않은 나의 불안이 만들어낸 것들이었다.
난 더 실패해야 한다.
성공을 손에 넣기 전에, 아직 손에 쥐어진 실패가 많이 남아있다.
완벽한 배경을 만들고 싶어서 배웠던 배경 프로그램도 잠시 접어두고,
작업에 도움이 되는 컴퓨터도 전부 꺼버리고,
영감의 원천이라던 연필과 종이도 서랍에 넣었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 나는 오늘 아무도 안 볼 망작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펜을 들었다.
그렇게 든 펜은 여느 때와 다르게 너무나 가볍게 들어 올려지더니
쓱싹쓱싹 백지 위에서 춤을 췄다.
아니, 펜은 그대로였고 내 마음이 춘 걸지도 모르겠다.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명작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은 한 글자도 못 쓰게 만들었다.
이 책을 완벽하게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마음 역시 종이 한 장을 천근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넘쳐나는 생각들이 목까지 차오르며 숨통을 조일 때 즈음...
스스로를 향한 말 몇 마디가 숨통을 틔워 줬다.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고 일단 그냥 해보자.
내가 가진 것들로, 잘할 수 있는 것들로, 하고 싶은 것들로... 그냥 한번 해보자.'
생각의 홍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