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난 자존심
이번 공모전에서도 떨어졌다.
처음에 그 거절을 맛봤을 때, 가슴에 구멍이 뚫리듯 아팠다.
1년에 한 번 있는 그 공모전을 위해
1년 동안 준비해서 제출한 내 시나리오.
몇 번이고 읽어가며 망상에 가까운 상상을 하곤 했다.
영화로 만들어지면 어떤 모습일까,
누가 이 캐릭터에 어울릴까,
어떤 음악이 언제 들어가면 좋을까.
하지만 이젠 오갈 곳 없는 그 종이뭉치를 서랍 속에 넣는다.
절대 버리는 게 아니니 쓰레기 통은 아닌 그곳으로.
언제 다시 꺼내겠다는 약속은 할 수 없으니 책장은 아닌 그곳으로.
나랑 가장 가깝지만 눈에 띄지 않는 그곳, 서랍 안에 시나리오를 넣는다.
이제 다음 1년을 위한 새 시나리오를 다시 1년 동안 준비 해야 한다.
시나리오를 쓴 지 수년이 흘렀고 내 몸에는 그만큼의 구멍들이 났다.
크고 작은 다른 공모전까지 합하면
내 몸에 뚫린 구멍의 개수는 더 많다.
일확천금을 노리듯, 자신감 있게 도전한 큰 공모전들과
무너진 자신감 회복을 위해 도전한 작은 공모전들 모두 상처로 돌아왔다.
부끄럽지만 어느 것 하나 내 구멍을 메워준 시나리오는 없었다.
하도 구멍이 숭숭 뚫리다 보니,
이대로라면 책상 위 내 모습이 더 이상 남아나지 않겠구나라는 걱정이 들었다.
언젠가 구멍이 나보다 더 커질 터였다.
지금 두려운 것이 한 가지 있다.
다름 아닌 그 고통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내 몸을 관통하는 그 상처의 고통에 대한 익숙함.
처음 몸에 구멍이 났을 때는 몸서리치도록 아프더니,
몇 날 며칠을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더니,
이제는 밥도 맛있게 잘 먹는다.
유명한 TV쇼도 보고
소파에 늘어져, 친구들과 즐겁게 연락도 주고받는다.
어제도 온몸에 구멍을 주렁주렁 달고서, 그런 상처가 없는 사람처럼 하루를 보냈다.
분명 이번에도 큰 구멍이 났었으려 만,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내 이름이 없는 명단을 보며,
내 시나리오의 제목이 없는 명단을 보며,
'음. 없네.'
하고 말았다.
그 상처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도망치듯 뛰던 내 발걸음이 더뎌질까 무섭다.
거절이라는 것이 내 시나리오의 당연한 결과로 생각될까 두렵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다음엔 되겠지 뭐'하는 마음을 품는 내가 걱정스럽다.
안주할까 봐 겁난다.
옛날처럼,
토하고 싶다.
거절받는 게 너무 싫어서 먹은 걸 모두 뱉어내고 싶다.
구멍이 뚫리는 고통이 너무 끔찍해서 사력을 다해 그것으로부터 달아나고 싶다.
그때 그날의 나처럼,
거절당한 시나리오를 밤새 반복해서 읽어가며 분노에 떨고 싶다.
'다음엔 진짜 죽여주는 걸 쓸 거야'라고 고함치던 내 안의 목소리도 듣고 싶다.
불 꺼진 방을 뛰쳐나가려는 사람처럼,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고 넘어지고 구르면서도 바닥을 더듬어 대던
그때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실패를 위로하려 나를 쓰다듬던 내 손길에 내가 잠들지 않기를,
손끝에서 느껴지는 구멍들에 정신이 바짝 들기를,
실패라는 놈이 내 몸에 낸 구멍을 아파하고 미워하고 분노하기를 바란다.
구멍 난 자존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