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 것
객관적으로 보자면,
내 일본 유학은 실패였다.
어쨌든 자퇴로 마무리 지어졌고
'개인적으로는 좋은 경험이었다'
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그 시간은
실패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것 같다.
유학 시절,
라면 물을 끓이다가 실수로 손이 데었던 적이 있다.
그때 '앗 뜨거'하고 뱉었던 외마디 비명이
그 주에 내뱉은 첫마디 었다.
언제를 마지막으로 말을 했지?
저번주 주일, 예배 때가 마지막이었다.
누군가 나의 유학 생활이 왜 실패였냐고 물으면,
가장 처음 들려주는 이야기가 이것이다.
외롭고 무력한 나날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의 나는 도대체 무엇을 바랐기에,
무엇에 실망했기에,
무엇 때문에
방 안에 스스로를 가뒀을까.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은
이왕 이렇게 된 거,
혼자 있게 된 거.
나 스스로에게 집중해 보자고 마음먹었다는 것이었다.
혼자 잘 있어 보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전공인 애니메이션을 넘어서, 극영화를 닥치는 대로 봤다.
말할 사람이 없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글로 써 내려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타를 우비로 감싼 뒤,
자전거로 30분을 달려서 교회에 갔다.
매주 텅 빈 예배당에서 밤늦도록 기타를 치는 것이
내가 일주일을 버티는 힘이었다.
6일 동안 영화를 보고 글을 썼고
하루 동안 목이 터져라, 손끝이 찢어져라 기타를 쳤다.
매주 매주 그렇게 2년을 꽉 채웠고...
3학년이 되던 해, 자퇴했다.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졸업장도 없이 빈손으로 한국에 왔던 나는
'허송세월', '시간낭비'라는 단어들과 참 많이 싸웠다.
남들은 황금기라고 부르는 20살, 21살을 그렇게 보냈으니
2년보다 더 큰 시간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아직도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을 말해 보라 하면
일본에서의 시간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지금...
자퇴한 지 10년 만에 일본에 왔다.
무표정한 얼굴의 근육이 아직도 느껴지는 나의 학교,
무인도 같던 나의 원룸,
조용한 등굣길에.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나 역시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꿈을 꾸니
변한 게 없는 건 나도 똑같네.
아, 한 가지 변한 게 있다면
숨소리와 걸음소리로만 가득하던 등굣길이
이번만큼은 조용하지 않다.
길이 너무 이쁘다며 사진 찍어 달라고 조르는 아내의 웃음소리로 가득하다.
혼자 잘 지내보자며 발버둥 치던 그곳에
아내와 함께 왔다.
아내 말대로 길이 예뻤다. 이렇게 예쁜 길이었나 싶다.
우리는 학교 정문으로 향했다.
입학 사진만 찍고, 끝내 졸업 사진은 찍지 못했던 그곳.
거기서 아내와 셀카로 둘의 사진을 남겼다.
그리고 찍은 사진을 보며 내가 믿는 신께 기도했다.
“하나님. 이게 제 졸업사진입니다.”
그 기도와 함께 벅차오르는 감정을 스스로 달래던 나를,
아내가 발견하고 토닥여 줬다.
"고생했어."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나만의 졸업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20대의 시간을 견뎌 냈어야지만
얻을 수 있는 지금의 직업, 영화감독이라는 꿈, 아내와 함께하는 가정이라면
힘든 시간을 잘 지내 준 스무 살의 내게 고맙다고,
다 끝났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길었다. 10년이라니.
위에 있는 그림은
2학년 수업에서 과제로 그린 그림이다.
주제는 “실존했던 위인 그리기”.
발표시간에는 주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유학생의 그림쯤으로 봤을지 모르겠지만,
예수님은 실존하신다는 나름의 신앙고백이었다.
그 당시 날 왜 혼자 두셨냐며 신을 원망하면서도
나와 함께 해달라는 마음이 가득했던 거 같다.
나와 함께 해주세요.
마치 내가 많은 것을, 대단한 것을 이루고
힘들었던 시절을 돌아보는 것처럼 썼지만
지금도 별반 다를 게 없다.
꿈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고
공부는 너무 힘들고
일도 내일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른다.
불안한 것투성이다.
그러니 나는 매일 밤, 십 년 전과 똑같은 기도를 드린다.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내일도 나와 함께하여 주세요.
너는 내 것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