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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주영 Jan 26. 2023

길에서 만난 남자

 남편과 길에서 만났다고 글을 썼더니, 만나는 사람마다 묻는다. 질문엔 길에서 만났다고 후려칠 만큼 사이가 좋지 않은 건가 싶은 호기심과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지 걱정하는 마음이 섞여 있다. 남편과는 정말 길에서 만났다.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모악산 어느 순례길에서.


 이십 대의 나는 방랑자인 시절이 잠깐 있었는데, 한국에 면접 보러 들어왔다가 바로 출근하게 되는 바람에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때마침 본업과 비슷한 부업도 들어와 주말에도 눈코 뜰 새 없이 일하던 터라 쉼이 간절했다. 그러다 당시 즐겨보던 시사잡지 ‘시사IN’에서 주말 당일치기 순례길 걷기 모집 글을 보았다. 이른 새벽 시청역 앞에서 모여 관광버스를 타고 금산사로 출발하여 수류성당까지 걷는 순례길 코스였다. 돈만 내면, 나는 아무런 준비 없이 버스에 몸만 실으면 된다니, 솔깃했다. 갑갑한 서울을 가볍게 탈출할 절호의 기회다.


 출발 장소인 시청역에 갔다. 출구로 나섰더니, 지하철역 앞에 어떤 남자가 혼자 서있다. 이른 새벽부터 편한 차림과 운동화를 보건대, 순례길 걷는 사람일 텐데, 왜 지하철 입구에 서 있을까.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것까지야 내 알 바 아니니, 나는 출구를 벗어나 근처에 정차되어있을 버스를 찾아 직진했다. 버스에 탑승하고 조금 지나니, 지하철 출구에서 서 있던 남자가 뒤이어 버스에 올랐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구나.


 버스는 고속도로를 거침없이 달려 오전 8시, 약속된 시간에 정확한 장소에 나를 내려줬다. 알록달록한 단풍이 가득한 금산사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청명한 하늘 아래 말갛게 쏟아지는 햇살, 노랗고 붉게 물든 색색의 단풍, 신선한 공기, 절의 향냄새까지. 한국의 가을 정취를 느끼기에 모든 것이 완벽했다.


 ‘아, 흠뻑 취하고 싶다!’ 머릿속에 막걸리가 스친다. 애주가의 본능은 숨길 수가 없다. 나는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의 행렬 끝에서 천천히 걸었다. 한국엔 지역마다 다양한 막걸리를 판다. 이날을 온전하게 기억하기 위해선 금산사의 막걸리를 맛봐야 했다. 절을 내려가며 기념품 가게와 함께 있는 슈퍼를 찾았다. 슈퍼를 발견하곤 잽싸게 들어가 막걸리를 한 병 산다. 아름다운 가을 풍경과 함께 순례길을 신나게 걷고 난 후 꿀맛일 점심 식사와 막걸리를 곁들일 생각을 하니 짜릿해진다. 나도 모르게 신이 나 입꼬리가 올라간다. 배낭 주머니에 경쾌하게 막걸리를 담고 있는데, 절에서 어떤 남성이 내려온다. 행렬에서 떨어진 사람인가보다. 아침부터 막걸리를 배낭에 쑤셔 넣고 있는 모습을 타인에게 들키고 싶진 않았는데, 저 남자는 뭐람. 아… 새벽에 시청역 출구 앞에 서 있던 그 남자잖아. 눈이 쪽 째지고 쌍꺼풀이 없는 게 몇 년 전에 헤어진 남자친구를 닮았다.

     

 식당에 도착했다. 낯선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도 오랜만이다. 아까 슈퍼에서 마주쳤던 이상한 남자는 다른 테이블로 배정됐다. 어색한 분위기도 없앨 겸 배낭에서 수줍게 막걸리를 꺼내 사람들과 한 잔씩 마셨다. 기분이 좋다. 식사를 마치고 순례길을 함께 하시는 문규현 신부님과 가볍게 이야기를 나눴다. 식당 주변을 돌며 잠깐 숨을 돌릴 차에 뒤에서 누가 말을 건다.


“아까 그 막걸리는 다 드셨나요?”


 또 그 남자다. 대궐 같은 식당도 아니고 작은 식당에서 사람들과 막걸리 나눠 마신 게 빤히 보였을 텐데… 뭘까, 이 남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남자는 오후 내내 옆에서 떨어질 줄 모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정신이 혼미해진다. 피할 곳도 따로 없고 목적지가 같으니 걷는 수밖에 없다. 허공으로 맥없는 웃음이 피어오른다. 목적지인 수류성당에 도착했다. 이 남자, 또 옆에 앉는다. 편집자님의 소감을 듣는 중에 휴대전화를 내민다. ‘게임 설문 조사 때 여쭤볼 일이 있을 것 같은데, 연락처 알려줄 수 있나요?’ 나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본다. 아까 길을 걸으며 게임 안 한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빤한 수작이 당황스럽다.


 순례길을 모두 걷고 전동성당이 있는 전주로 향했다. 저녁은 각자 해결하고 정해진 시각에 버스에 올라타면 된다. 버스에서 내렸다. 뒤이어 그 남자가 따른다. “저녁 같이 드실래요?” 달리 할 말이 없어 길을 같이 걷는다. 적당한 식당을 찾는 길에 남자는 자신을 소개한다. 공대생이란다. 공대에 대한 환상이 있던 나는, 잠깐 그 남자를 똑바로 바라본다. 식당에 도착했다. 저녁 먹는 내내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혼자 멍 때리려고 온 여행인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가까스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버스에 올라탔다. 내 자리는 운전석에서 가까운 앞 좌석이다. 남자는 뒤쪽 좌석으로 향한다. 버스가 출발한다. 서울을 향해 고속도로를 달리는 어두컴컴한 버스 안에서 휴대전화 알람이 울린다. 확인하니 그 남자다. 캄캄한 버스 안에서 휴대전화를 확인했으니 그 불빛이 빤히 보였을 텐데, 잠든 척도 어렵고, 읽고 씹을 수도 없고, 나는 대충 대답한다. 드디어 서울에 도착했다. 남자는 강남역에서 먼저 내리면서 인사를 하고 사라진다. 뒤이어 또다시 휴대전화 알람이 울린다. 그 남자가 보낸 문자 메시지엔 ‘고기와 술’을 살 테니 한번 보자고 쓰여있다.


 낯선 남자는 예쁜 말을 구사했다. 예의 바르고 부드러운 화법으로, 하지만 집요하게. 그래서 거절하지 못하고 말을 주고받다, 정신 차려보니 결혼했더라는 이야기. 어제는 이른 저녁 잠을 청했는데, 잠결에 이불을 안 덮고 있으니, '왜 이불을 안 덮어?' 라고 어르듯이 말을 건네곤 이불을 덮어주고 갔다. 남편의 걱정과 애정이 담긴 어조에 나는 안심이 되어, 아직도 이 남자와 함께 산다.


문제의 그 막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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