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있으면 이제 입춘입니다. 이번 겨울은 난방비도 많이 오르고 유난히 추워서, 언제 겨울이 끝나나 싶었는데, 저 멀리 봄이 다가올 채비를 하네요.
제 겨울은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조금 벅찼습니다. 초등학교의 겨울 방학은 길거든요. 초등학생 어린이 두 명의 일과를 책임져야 하다 보니, 선반 위의 먼지처럼 슬그머니 쌓인 피로가 개학을 앞두고 감기로 돌아왔습니다. 다행히 약한 감기여서 그럭저럭 버틸 만은 한데요. 몸이 힘들면 덩달아 정신도 피폐해져서 마음에 시퍼런 멍울이 생겼습니다. 이럴 땐 햇볕을 쬐며 산책을 하면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되곤 했는데, 고뿔이 매달려있으니 매서운 겨울바람 앞에선 그것도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몸에 생생한 에너지를 불어 넣는 운동 대신 어딘가 앉아 책을 뒤적이면, 위대한 작가들의 뛰어난 문장력에 기가 죽고 맙니다. 울증이 찾아오면 세상에서 나란 존재는 가장 쓸모없이 느껴지고 초라해 보이거든요. 출발선이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까지 겹치면, 노력이 과연 무슨 소용인가 싶어 자조 섞인 웃음마저 피어오릅니다. 꽃이 꼭 봄에 피는 건 아니라지만, 가을 겨울까지 기다리는 꽃들은 어떤 생각으로 버티고 있을까요. 혹독한 환경 앞에 피우지 못하고 죽어버린 꽃들을 생각합니다. 그것이 명확한 현실이지요. 저는 허무맹랑한 희망 따위는 이제 싫은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찾아올 봄을 다시 기다립니다. 미련 없이 죽을 용기도 없거니와, 내 뱃속에 열 달을 품어 바깥세상에 내어놓은 어린이들에게 난데없이 세상이 무너지는 슬픔을 줄 수는 없기에, 뜨거운 불안함을, 마음을 새까맣게 태운 불안함을 잠재워줄 무언가를 찾아봅니다.
휴대전화 속 사진첩을 열어 지난날의 즐거움을 만지작거립니다. 사진첩엔 가족과 함께 한 시간이 대부분입니다. 남편 그리고 어린이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기억. 이땐 이랬지, 저땐 그랬지. 즐거웠던 한때 그사이에 섞인 사건 사고들을 떠올리며 시간을 복기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슬픔도, 고통도, 분노도, 기쁨도, 환희도 모두 뒤섞여있습니다. 사진 속의 나는 웃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냥 기쁜 날은 없습니다.
시간을 곱씹다 ‘그때의 나는 어떤 꿈을 꾸었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지?’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현재 내 모습을 바라보지요. ‘그때 꿈꾸던 내 모습에 한 발자국 가까워진 사람이 되었을까?’ 다시 묻습니다.
조금이라도 나아졌다면, 혹은 뒷걸음질 쳤더라도 괜찮다고, 마음을 쓰다듬어 봅니다. 꽃샘추위는 겨울의 사늘함보다 더 날카롭지만 뒤늦게 찾아온 봄에도 싹은 움트니까요. 저는 입춘이 지나고 나면 길가의 나뭇가지를 유심히 살펴보곤 합니다. 혹독한 추위에 겉껍질이 트고 시꺼멓게 말라서 죽어버린 것 같은 고목의 질기고 거친 껍질에서도 아주 작은 초록빛이 움트기 시작하거든요. 여리고 조그마한 싱그러움을 마주하고 있으면 마치 갓 태어난 아기를 보는 것처럼 기쁘기도 합니다. 꽃을 활짝 피우지 못해도 초록의 생명이 싹트는 봄은 신비롭고 웅장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른이 되어도 지난한 삶의 굴레에서 해결되지 않는 반복된 의문으로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흐르는 순간이 있습니다. 뉴스를 들여다보면 매일매일 들려오는 흉흉한 소식에 진저리가 나기도 합니다. 어그러진 탐욕과 신념으로 지구 어디에선가는 전쟁을 하며, 사람이 사람을 향해 총을 겨누고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깁니다. 내가 사는 곳이라고 다를까요. 도시의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자신을 뽐내며, 동시에 누군가를 헐뜯고 장난으로 던진 돌에 어떤 이의 마음은 죽어버립니다.
책상에 앉아 기다란 한숨을 내쉬다, 뛰어난 재능이 있었음에도 세상의 빛을 누리지 못하고 사라진 김명순 시인의 산문을 손가락으로 만져봅니다. 여성 작가 최초로 창작집을 발간하고, 다양한 장르에서 두각을 보였지만, 모욕적인 소문의 희생자가 되어 결국 글쓰기를 중단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다 도쿄에서 외롭게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 문인 김명순. 그녀에게 세상은 혹독한 겨울 이상의 냉담함으로 그 잔인함이 뼛속까지 시큰하게 남아있을 터임에도, 그녀의 글에는 사랑이 스며있습니다. 그녀의 글에 담긴 희망을 노래하는 따스한 울림에 잠들어 있던 허기를 느낍니다. 살아 숨 쉬는 생명만이 느낄 수 있는 배고픔의 소리에 몸을 추스릅니다.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합니다. 위대하고 광활한 우주 앞에서 먼지 같은 내 존재가 초라해 보일지 몰라도, 적어도 내게는 아직 사랑할 기회는 남아있으니까요. 봄을 향한 걸음 속에 사랑이 샘솟기를 바라며, 세상을 향해 한 발자국 내디뎌 봅니다. 조만간 여린 분홍빛으로 손에 내려앉아 조그맣게 빛날 나만의 작은 봄을 만끽하기 위해서요. 그땐 나도 당신과 함께 초록이 깃든 사랑을 노래하렵니다.
우주는 적멸하고 인류는 사멸합니다. 그러나 이 멸망해가는 우주와 인류 간에도 영구불멸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신념이요 지성이요 진리요 사랑이외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멸망해서 자취를 찾을 수 없으나 그대로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 김명순, 「사랑?」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