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온다

by 전주영

비가 내린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두툼한 패딩을 입었는데, 언제 겨울이었냐는 듯 바람 사이 날 선 느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글쓰기 위해 들린 카페의 통유리창 너머 앙상하게 마른 가로수를 바라본다. 식물에 관심 없는 나는 저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모른다. 문득 이름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름을 알면 저 나무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까. 나무의 기둥은 뙤약볕 아래에서 한평생 고된 노동을 한 노인의 주름처럼, 거친 손마디처럼 울퉁불퉁하고 갈라져 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나무의 가지는 볼품없이 잘려있다. 나뭇가지는 여러 방향으로 손을 내뻗었는데, 도시를 지키는 누군가는 나무의 가지를 태없이 잘라놓아 손질이 아닌 난도질한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관심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이들도 있겠지……

도심의 바닥은 온통 콘크리트와 대리석인데, 그 사이 나무가 속해있는 한 평이나 될 법한 좁다란 틈의 흙은 그에게 충분할까. 뿌리는 얼마나 깊이 내려가 있을까. 깊게 뿌리 내릴 수 있을 만큼 공간이 있기나 할까. 저 자리에선 얼마나 살았을까. 움직이지 않고 한곳에서 평생 지내야 한다는 게 어쩐지 가련하게 느껴진다.

너를 스쳐 지나간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그중 네 이름을 불러주는 이가 있었을까. 누구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면 기나긴 고독의 세월을 무엇으로 버틸 수 있었을까.

이런저런 상상의 끝에서 불현듯 외로워져, 나는 눈으로 나무의 온몸을 훑는다. 이 봄비가 그치고 완연한 봄이 오면, 너는 언제 앙상한 몸이었냐는 듯 초록 옷을 입고 온몸으로 도심의 뜨거운 햇살을 막아주겠지. 오롯이 내어주는 삶을 살고 있구나. 비바람이 불어도, 거센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키면서.

잿빛이 도심을 뒤덮고 스산한 봄비를 맞으니 애써 눌러왔던 불안함이 고개를 치켜든다. 무언가 열심히 하는데, 눈에 띄는 성과는 없고 도통 제자리걸음인 듯하다. 어디론가 힘차게 걷고 싶지만 방향을 잃은 느낌이다. 내게 주어진 재능은 무엇일까. 그런 것이 내 안에 존재하기는 할까. 이런 볼품없는 글이나 쓰고 있자니 이내 한숨이 밀려온다. 나이 들어가며 삶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은 마음이 점차 강해진다. 넘쳐흐르는 욕구에 비해 유약한 자신이, 부족한 능력이 때때로 슬퍼진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이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자도 온전히 나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이 버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고뇌의 굴레는 언제쯤 끊어질까.

낮에 카페에 앉아 글쓰기 시작했는데 어느덧 어스름이 내렸다. 여섯 시가 지나자마자 건물에서 나온 사람들로 거리가 북적거린다. 카페에 앉아 창을 통해 바라본 거리의 사람들은 누구 하나랄 것 없이 모두 어디론가 향해 열심히 걸음을 옮기고 있다. 그들 모두 뚜렷한 목적지가 있는 것일까.

이름 모를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느끼다, 생각을 고쳐먹었다. 나도 이제 그만 퇴근해야겠다고. 화려한 기교가 있는 글은 아니어도, 오늘도 한자리에 오래 앉아 모니터의 빈 화면을 바라보며 고민한 시간이 있었다.

오늘의 몫을, 오늘의 글을 썼다는 행위를 칭찬하자. 이제 랩탑의 전원을 끄고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가자. 때로는 어깨에 힘을 빼고 때로는 머릿속을 비우고 군중 속을 향해 뛰어들자.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누가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누가 쓰다듬지 않아도 제 몫을 잘 해내는 나무에 경외심을 느낀다. 봄비가 내게도 푸른 잎사귀를 안겨줄 그 날을 기다리며……


괜찮다, 오늘도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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