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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주영 Oct 03. 2022

오늘의 내가, 당신에게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야기를 듣는 시간보다는 내가 말하는 시간이 대부분이니, 마음속 동굴에서 이야기를 꺼내놓는 시간이다. 아주 깊은 곳에 가둬뒀던 이야기부터 목을 조이는 이야기까지 하나씩 풀어내고 조각난 이야기를 퍼즐 맞추듯 완성해가는, 그런 시간. 사소한 비밀부터 일상을 깨뜨릴 수 있는 위험한 칼날 같은 이야기까지도, 나는 하나씩 잘라내어 테이블에 올려놓고 있다.

 처음 본 사람을 어떻게 믿어야 할지 막막했지만, 한편으로는 크게 중요하지 않기도 했다. 말하고 싶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대나무 숲에 가서 외친 이의 마음이 이랬을까. 누구라도 내 비밀을 들어줬으면 했다. 숨겨왔던 상처나 금지된 욕망에 대해서. 아니나 다를까, 얇게 조각낸 이야기를 테이블에 올리자마자 입안에서는 작은 구슬들이 매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짙은 감색의 구슬부터 머스터드 빛 노란 구슬, 그리고 핏빛 서린 다홍빛 구슬까지. 분노 어린 감정인지 슬픔인지 이제는 알 수 없는 감정들.

 목 안에서 꺼낸 짙은 감색 구슬을 상담자에게 건넸을 때, 커다란 비커에 담긴 투명한 물에 한 방울 떨어뜨린 잉크가 하늘거리며 퍼지듯 감정은 예상할 수 없는 모양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번짐이 상담자에게는 어떤 온도로 느껴졌을까. 이상한 감정과 행동, 하지 말아야 할 것과 이미 저지른 것들. 하지만 물은 엎지르면 되담을 수 없듯 나는 이제 엎지른 물을 닦아내는 것 말고는 답이 없는 사람이었으므로 말을 계속 이어갔다.

 어느 날에는 핏빛 구슬을 꺼내놓았다. 이건 분노였을까, 혹은 좌절감이었을까. 기억을 되짚어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흐릿한 기억을 더듬을 때마다 구슬은 날카롭게 조각나서 나를 찔렀다. 흐릿한 기억 사이로 입에 맴도는 비린 맛. 이건 무력함일까. 얇은 종이 인형 같은 나를 갈가리 찢어버린…… 누군가의 손길들. 어쩌나, 이건 아직 5%도 꺼내놓지 않았는데……. 말을 이어가도 될까. 구슬은 산산조각이 났고, 구슬의 파편이 온몸에 박혀 나를 무너뜨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상처 나지 않았기에 아물 기회조차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형형색색의 작은 천을 이어 붙인 퀼트처럼 다양한 이야기가 한데 뒤엉켜 나왔다. 다만 내 이야기들은 부드러운 천의 질감도 아니고 가느다란 실로 매끄럽게 연결한 것도 아니어서, 꺼낼 때마다 뾰족한 가시가 목을 할퀴어 울고 싶은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새하얀 테이블 위에서 혼자 눈물을 흘리려니 발가벗은 기분이 들어 눈물은 잠시 가둬두기로 했다. 상대는 옷을 입고 있다. 비록 지금 내가 스스로 옷을 벗고 있긴 하지만, 적어도 수건 정도는 한 장 걸치고 싶은 알량한 자존심이었달까. 미친 사람처럼 다 벗어젖혀도 후련할 것 같긴 하지만, 아직은 이르다. 친구끼리도 목욕탕은 아주 친해진 다음에 가는 거니까.

 하지만 상담을 거듭할수록 내면을 헤집는 데에도 가속도가 붙어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다짐을 한 지 며칠 안 지나서 나는 결국 하얀 테이블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날은 칠흑 같은 어둠을 닮은 구슬이 올라왔다. 얇은 고무풍선 안에 담겨 있던 새카만 어둠은 터질 듯 터지지 않을 듯 실랑이를 벌이다 부드러운 문답법의 바늘에 찔려 결국 터지고 말았는데, 끈적한 고무 액체가 순식간에 온몸을 잠식해 나는 울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다. 이쯤에서 내가 눈물을 흘릴 줄 그녀는 알고 있었을까. 나는 준비하지 않았던 티슈를 그녀가 내밀었을 때의 민망함과 당혹스러움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그날은 주룩주룩 눈물의 홍수를 이뤘을지도 모르겠다.

 다섯 번째의 만남에서 그녀는 내게 검사지를 내밀었다. 평소 상담 시간보다 10분 정도 이르게 도착한 날이었는데, 일찍 온 김에 이거 한번 해보겠냐며 대수롭지 않은 척 건넨 그 검사지는 ‘성인 애착 유형 검사’였다. 정확히 어떤 검사인지 모르면서도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사지의 문항을 하나씩 읽어 내려가며, 나는 무엇을 선택하면 안 되는 건지 직감적으로 느꼈다. 외면하고 싶은 마음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은 마음, 그 사이에서 솔직해지기란 얼마나 어렵던가. 

 이때부터였을까. 상담 시간에 그녀에게 건넨 말들이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파국과 차선, 차악 등 여러 단어가 오갔던 찰나의 조각만 기억에 남는다. 현실이라는 세계를 가르면 뜨겁고 빨간 피가 솟구칠 줄 알았는데, 그날 그 세계를 쪼개서 흘러나왔던 건 스산함이었다. 

 파국은 뭘까.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스산함이 새벽의 청명함으로 바뀔지도 모르고, 나의 최선이 타인에게는 최악이 될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이것도 주지화 방어기제일까. (그녀의 말에 의하면, 내가 나를 지키는 방법으로 주지화(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불쾌한 생각이나 상황을 개념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는 과정)를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

 검사 결과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여서 놀라지 않았다. 그녀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하나하나 맞는 말들이어서 속으로 뜨끔해 박수를 쳤다. 

 그 결과에 따르면 나는 불안도, 회피하려는 성향도 큰 사람이란다. 누군가에게 미움받을까 두려워하고 혹은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지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어 하는 내 안의 아이 같은 모습을…… 나는 알고 있었다. 상처받기 싫은 발버둥이었다. 길에서 떼를 쓰며 이렇게 행동해도 이 사람은 나를 버리고 가지 않을 것이라는, 부모의 사랑을 확인하려는 어린아이처럼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얻고자 상대를 끊임없이 시험하며 애정을 확인하고 갈구했다. 나와 관계를 이루는 상대는 내 부모가 아니라 서로 소통을 하며 관계를 이루는 사람인데 말이다. 

 나는 내 안의 나약함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어 담담했지만 상담이 끝난 후 혼자 있는 시간에 나를 감쌌던 감정은 갑자기 내린 소나기를 온몸으로 맞은 듯한 축축한 슬픔이었다. 조금 더 멋진 어른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제 그녀와 작별을 앞두고 있다. 헤어지는 마당에 나를 조금 더 드러내도 괜찮겠다는 마음이 들어 그녀에게 내가 쓴 글을 보내게 되었다. 상담실을 벗어난 후의 연락은 민폐가 아닐까 하는 걱정과 함께, 고객을 향한 틀에 박힌 적당한 반응을 보일 것이라 예상하며 보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녀는 내게 장문의 글로 답을 보냈다. 글이 하도 길어서 200자 원고지로 분량이 얼마나 되나 살펴봤더니 무려 13장이나 되는 글이었다. 

 그 글에서 그녀는 어찌나 조곤조곤 말을 잘하는지, 상담하는 동안 주로 듣고 있던 그녀는 말하고 싶은 욕구를 그간 어떻게 참았을까.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던 글에는 찔러도 뚫리지 않을 것 같은 질기고 단단한 갑옷을 입고 온 것처럼 느껴졌다는 나의 첫인상과 함께 상담을 이어오며 이제는 내가 그녀에게 있어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존재로 다가오고 있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나는 그 말이 고마워서 몇 번을 읽고 또 읽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순간은 언제일까.’

     

 상담 시간은 짧고 혼자 있는 시간은 길다. 혼자 남은 밤. 거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짙게 내려앉은 고독의 무게를, 그녀는 알까. 내면에서 꺼내 올린 알록달록한 감정의 구슬을 쓰다듬다 보면, 나는 그녀의 노트가 궁금해진다. 그녀는 나를 어떻게 기록하고 어떤 사람으로 분석하고 있을까. 

 예정되어 있던 상담을 모두 마치고 마침표를 찍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몇 달을 만나온 상담자와 작별하며 슬플 것이라 예상했던 감정은 의외로 괴롭지 않았다. 만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언제든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 사이에 존재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내면을 객관화하는 과정을 겪으며 내가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어렴풋이 깨달아서일까. 비 내린 다음 날의 청명한 하늘처럼 마음이 단조롭고 명쾌하다. 

 해결된 문제는 없다. 다만 내면의 약한 점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던 오늘의 내가 자신에 대한 이해를 통해, 누군가 손 내밀어 주기만을 바랐던 어제의 나보다는 한 뼘 더 성장해있기를 바랄 뿐이다. 부서진 조각을 찾아 떠났던 여행의 말동무가 되어준 그녀에게 감사하다.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쉽게 부서질 것 같았던 과거와 단단한 암벽이 되어 파도를 마주할 수 있는 오늘의 내가, 당신에게 안부를 전한다.                                    




 에필로그     


 요즘 나는 영화 ‘애프터 양(After Yang)’의 삽입곡 Mitski의 「Glide」를 반복 재생해서 듣는다. 그저 존재하면서 어떤 형태든 세상의 일부가 되는 것에 대해 노래하는 가사를 곱씹으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햇살은 뜨겁고 습도는 높고 거리의 사람들은 너도나도 분주하고. 그 속에 나도 슬그머니 섞여 어디로든 걸어본다.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도, 이제 괜찮을 것 같다.        


 

 There’s no something without nothing.     







** 지난 초여름 쓴 원고, 『감정의 구슬』과 『Something or nothing』을 퇴고하여 하나의 글로 묶었습니다. 덧붙여진 내용도 있고, 글의 결이 살짝 달라졌기에 새로 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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