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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주영 Oct 06. 2022

지키지 못한 약속

 빈말을 싫어한다. ‘언제 밥 한번 먹자’라는 흔한 인사말도 이젠 쉽사리 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만나 인사를 할 때면 이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는지, 이 사람을 위한 시간을 내고 싶은 건지 가늠하고 어색하지 않을 적당한 인사말을 고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실없는 말을 하기도 싫거니와,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데 없는 애정을 포장하고 싶지도 않았다.

 여러 사람과의 인연이 덧대어지며 언제부턴가 약속은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증명하는 하나의 도구라는 생각을 했다. 당신과 나 사이의 비밀의 정원으로 들어설 수 있게 만들어주는 작은 열쇠 같은 것. 약속을 하나씩 지킬 때마다 당신을 내 안으로 들어오게 만드는 일종의 초대장 같은 것이라고. 말에 깃든 힘을 느낀 이후부터 나는 좋아하는 사람과 약속을 할 때면 내가 한 말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지난 8월엔 갑작스레 하와이 여행이 결정된 뒤로 설렘보다 걱정이 앞섰다. 항공권을 발권하고 나서 2주라는 여행 기간은 짧지만 동시에 일상의 패턴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올 초부터 매주 화요일 연재를 하며 주말이면 책상에 앉아 머리를 부여잡으며 글을 쓰던 시간이 만들어낸, 일상에 자리 잡힌 습관. 애써 만든 습관 앞에서 미지의 세계가 몰고 올 여파가 두려웠다.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던 일상이 마치 젠가의 가장 아래 나무 블록이 빠지는 것처럼 새로운 물결로 인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진 않을까 두려움이 스며들었다. 그 두려움 안에는 구독자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은 욕망도 있었지만, 이렇게라도 애쓰지 않으면 글을 쓰지 않게 될까 봐, 글조차 쓰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까 봐, 초조하고 불안했던 마음이 있었다.


 불안함이 나를 이끄는 힘이다. 내게는 불안함을 기반으로 강박과 집념으로 이루어진 오랜 습관이 있다. 나는 식습관이 불규칙하며 술을 좋아하고 취하면 폭식하는 사람이지만 쇼핑을 매우 귀찮아하기에 살이 쪄서 옷이 맞지 않아 원하지 않은 때에 옷을 구입해야 하는 상황을 싫어한다. 간결하게 표현하자면 몸의 모양이 망가지는 것을 경계한다. 그러면서도 매일 이런저런 고칼로리 야식을 곁들여 와인을 마시니, 체중을 유지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일어나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거울 앞에 선다. 체중계에 올라 몸무게를 확인하고 근육의 형태를 바라보며, 무엇이 달라졌나 꼼꼼히 확인한다. 한 번 무너지고 나태해지면, 이 몸을 다시 가질 수 없을 것 같기에, 원하는 형태로 애써 만든 몸의 근육이 내게서 사라질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일상의 시간을 쪼개 트레드밀 위에 오르게 하고 덤벨을 사용해 운동하게 만든다. 짧은 거리는 걸어 다니며 지하철역에선 에스컬레이터보다 계단을 이용하려고 하는 등 일상에 스며있는 사소한 집착들, 모두 불안함이 키웠다.      


 그런 집착과 불안함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미술사 공부를 하던 어느 날,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위의 방랑자 「Caspar David Friedrich –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를 보며 담대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맹렬하게 요동치는 파도 앞에서,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안갯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의 뒷모습 속에 서려 있는 담대함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에 반해 나의 내면은 마치 가느다란 성냥개비로 지은 성처럼 허술하고 얇고 불안하여, 어디서 잔불이 날아와 순식간에 다 태워버릴지, 또는 강풍이 불어와 손쓸 틈도 없이 무너질지 알 수 없었다. 많은 시간을 우울과 불안 그리고 외로움에서 허우적거렸다. 누군가 내 손을 잡아주길 바라며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을 때, 운동은 나를 누군가의 도움 없이 혼자 바깥으로 걸어 나오게 만들었다.

 운동은 내면을 깊게 파고들어 작업하는 이에겐 최소한의 장치라고 생각한다. 침묵의 알을 깨어, 공허함을 무너뜨리고 살아 숨 쉬는 쾌감을 느끼게 만드는, 최소한의 장치.      


 유약하다. 나는 유약한 사람이다. 심리상담을 하며 파도를 마주 볼 줄 아는 단단한 바위 같은 사람이 되었다고 느꼈지만, 눈을 떠서 바라본 현실 속 나는 어느새 영화 「헤어질 결심」의 ‘서래’처럼 파도 앞에서 모래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들어가 있다. 어째서 매번 반복되는 걸까. 왜 내게는 사라지지 않는 우울과 불안이 서려 있을까.

 

 크고 작은 만남과 뜻하지 않는 이별들. 일상에서의 만남과 헤어짐은 내 예상을 뛰어넘는 큰 기쁨을 주는 동시에 커다란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인연이라 생각했지만, 마음 아프게 떠나보내야 했던 사람들. 말을 아끼며 관계의 마침표를 유예해보지만,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버린 인연들. 그 사이엔 지키지 못한 수많은 약속이 떠오른다. 누구의 탓도 아니면서 나를 침잠하게 만드는 기억들도 함께.

 미지의 세계에선 매일 크고 작은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었다. 여행을 하며 나는 내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어떤 질문도 또렷한 답을 내진 못했지만, 숨이 가빠지는 빅아일랜드의 마우나케아 언덕에 올라가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내가 느꼈던 건 이미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을 내려놓고 불투명한 미래를 향해 조금 더 담대하게 나아가고 싶은 욕망이었다. 한번 내뱉은 말을 번복하는 실없는 사람이 되더라도, 그 순간의 감정에 조금 더 충실한 사람으로, 나를 속이지 않는 사람으로 살고 싶은 어떤 욕망.    


 지키지 못한 수많은 약속을… 이제 떠나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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