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는데 등 뒤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와 통화한다. 내 귀를 사로잡은 건,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했지’라며 전화기 너머 누군가에게 멋쩍은 웃음과 함께 마음을 꺼낸 그의 맑은 목소리.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본다. 어떤 남자일까. 걷는 속도를 늦춰 그의 이야기 속에 빠져본다.
전화 통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언제부터 그랬을까. 삐삐를 사용하던 어느 시절엔 공중전화에 서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몇 번이고 곱씹었던 날이 있었다. 카카오톡 같은 메신저가 발달하기 전의 시대에선 음성사서함에 메시지를 저장하던 날도 있었다. 당신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면서, 내 마음이 온전히 전달되길 바라며 두 손으로 수화기를 붙잡은 채 숨을 잠깐 멈추고 별표를 누르던 순간들. 사선으로 어긋난 어떤 인연 틈으로 삭제되지 않은 채, 몇 년 동안 음성사서함에 머물렀던 메시지도 있었다. 시간이 흘러 몇 차례 휴대전화를 바꾸며 이제는 흐릿하게 남은 오밀조밀한 언어의 흔적.
언젠가는 친구가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났다. 몇 대 독자라고 불린 친구였는데, 호기롭던 20대의 그는 어머니의 걱정은 뒤로 한 채 혼자 전쟁터에 나서길 결정하고 어느 날 홀연히 떠났다. 누군가는 죽고, 죽여야 살아남는 현장에서 친구는 가끔씩 내게 위성 전화를 사용해 그곳의 소식을 전했다. 언제 폭탄이 터져도, 공습이 시작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장소에 있는 친구와 빌딩숲 사이로 평온함이 깃든 서울에 있는 내가 수화기 너머로 서로의 소식을 전할 때면 특별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친구가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오길 바랐던 마음, 친구의 안전을 기원했던 마음. 목소리의 울림을 통해 사람의 감정을 전달해주었던 전화는 사람의 마음도 이었다.
누군가는 이른 잠자리에 들 시간, 너털웃음으로 수줍은 마음을 감춘 중년 남성과 휴대전화를 통해 연결된 사람은 어떤 마음일까.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했다는 그의 고백이 기뻤을까. 모르는 사람의 마음을 더듬다, 전화보다 메시지가 익숙했던 어떤 사람과의 관계가 떠올랐다. 쏟아지는 졸음을 물리치고 시간을 쪼개 서로를 탐색하던 메시지가 쌓여 애틋한 관계를 형성했지만, 무르익지 못하고 곪아버린 관계. 오래…… 낯설었던 사람.
이국의 어느 땅에서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던 밤이 있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사용하여 지내는 일상은 피로도가 높았다. 하루 종일 어설픈 언어로 나를 표현하다 밤이 되면 외로워지는 때가 있었다. 말없이 온전히 서로의 체온을 탐하던 순간이 그리워지던 밤, 스며들 수 없는 타지의 거리를 혼자 거닐며 느꼈던 쓸쓸함이 마음을 뒤흔들었을 때, 그날 그 순간 내가 당신에게 전화를 걸었다면 당신은 내 목소리에 서려 있던 감정을 느낄 수 있었을까. 이런저런 이야기로 덧댄 문자의 꺼풀을 벗겨내어, 목소리에 실린 떨림으로 나의 외로움을 알아주길 바랐던 밤. 휴대전화의 빛을 밝힌 문자가 아닌 목소리를 타고 마음의 따스한 온도가 느껴지길 바랐던 늦여름, 나는 결국 그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의 등은 반쪽이었다. 지켜주겠다던 그의 달콤한 속삭임이, 내가 손을 내밀면 언제든 잡아줄 것 같던 그의 태도가, 알맹이가 없는 얇은 사탕 종이처럼 구겨진 어느 봄부터였을까. 나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밀려오는 거센 파도와 같은 감정을 문자 뒤에 숨겼고, 주고받는 메시지 속엔 차츰 체념이 피어났지만, 행간을 들여다보는 이는 없었다.
길을 잃을 것만 같은 밤엔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라고 한번 말해볼걸. 아무 때고 전화를 걸어 보고 싶어서,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했다고 말이라도 해볼걸. 연결되지 않은 전화를 붙잡고, 음성사서함에 쓰라린 마음이라도 남겨둘걸. 내 안의 가장 깊숙한 곳을 그에게 내어주었음에도 상처받기 싫어 주저하고 머뭇거리다 전달하지 않고 삼켜버린, 울리지 않은 언어들이 눈물로 얼룩진 한숨과 함께 쌓였다.
그리고 마침내 애틋한 마음으로 시작된 배려가 불편함으로 변질되자, 유예했던 헤어짐에 마침표가 찍혔다. 우리는 마침표를 앞에 두고 누구도 서로를 붙잡지 않았다. 서로의 심장을 붉게 물들였음에도, 익숙함과 안전함 사이를 저울질하던 관계의 예기된 소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