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불안함 너머, 새벽의 산책자

저작권이 없는 세상_연작 단편소설 1

by jaha Kim


“이건 내가 쓴 문장이에요.”




어느 늦은 오후,

종이 한 장 들고 내 앞에 선 중년 여인의 눈빛은 묘하게 단단했다.

겉으로는 조용했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자신을 증명하고자 했던 사람의 얼굴.

그녀는 내게 시 한 편을 내밀었다.

익숙한 문장이었다.

그 문장은 방금 내가 폐기 판정을 내린 아카이브 자료의 일부였다.

나는 다시 확인했다.

그녀가 내민 시의 문장은 이미 수십 개의 플랫폼에서 발견된 것이었다.

광고 카피로, 명상 앱 자막으로, 유명한 연설문의 첫머리로.

세상 어디서든 볼 수 있었지만, 어디서 시작됐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녀가 말했다.
“열두 살 때 썼어요. 저는 기억해요.

그때 바람 소리랑, 창문에 떨어지던 오후 햇살까지도.”


그녀의 이름은 라라-

이 세계에서 이름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붙이는 호칭이다.

라라는 단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세계 어딘가에서 이름 없이 살아가는 이들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물론, 공식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다.


1996년 12월. 개최된 제네바 외교회의의 ‘WIPO 저작권 조약'에서 '창작은 모두의 것'이라는 선언 아래, 인류는 저작권을 공식적으로 폐기했다.

그날 이후, 누구도 자신이 쓴 문장을 '자신의 것'이라 말할 수 없었다.

지금의 세계에선 누가 무엇을 만들었는지 묻지 않는다.

이름은 금기이자 사치였다.


나는 기억문장보존국에서 일한다.

출처가 불분명한 문장을 분류하고, 복제, 배포될 수 있는 공정이용 콘텐츠로 등록하는 게 내 일이었다.

하루에도 수백 개의 문장을 본다.

그중 몇 개는 이상하게도 내 안 어딘가를 건드린다.

하지만 규정상, 나는 감정을 붙여선 안 된다.


그런 내 하루를 라라가 흔들었다.




그날 밤,

그녀는 나를 그녀가 ‘사서들의 탑이라 말하는 곳으로 데려갔다.

도심 한가운데 있지만, 지도엔 없는 장소.

저작권 폐기 이전, 실명 창작자가 기록되던 마지막 아카이브가 숨겨진 곳.

어릴 적, 이곳에서 책을 빌렸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그때는 이 건물이 다른 이름을 가졌었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탑 안은 숨죽인 폐허였다.
걸을 때마다 바닥의 낡은 나무판자가 삐걱거리며 우리를 경계했다.
우리는 난간을 더듬으며 깊은 층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라라가 가리킨 철제 서랍을 열자, 차가운 금속 소리와 함께 빛바랜 어린이 노트 하나가 튀어나왔다.

나는 손끝으로 먼지를 닦아내고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넘겼다.

줄 위에 삐뚤게 적힌 문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문장 하나하나가, 내 속에서 잊혔던 감각을 깨웠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상상의 세계를 그렸던 밤들.
연필심이 부러질 때마다 다시 깎던 그 어설픈 집중력.
이상한 말버릇을 가진 괴물에게 ‘블리버’라는 이름을 붙여주던 기억.


“블리버는 거울 속에서만 말해. 나한테만 말해줄 거래.”


그리고 나는 그 노트의 첫 줄에 적었다.

“나는 이 거울 속에 살고 있어.


아무도 꺼내주지 않아서 너에게만 이야기하는 거야.”

그때 누군가가 옆에서 말했다.

“진짜 멋지다. 이건 너만 쓸 수 있어.”


그 말이 내 안에서 얼마나 오래 불빛처럼 남아 있었는지, 그때는 몰랐다.

내 입속은 말라붙었고, 내 목소리는 오랫동안 말을 잃었던 사람처럼 목이 메어 새어 나왔다.

“이건… 내가 쓴 거야.”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마치 북소리 같은 울림이 내 심장의 뒤편을 때렸다.

누군가에게 빼앗긴 게 아니었다.
나조차 잊고 있던 나의 일부를 되찾는 순간이었다.

기억이 빛처럼 날아와 내 안을 채웠다.
심장이 차갑고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두려움은 얼음 같이 차가웠지만, 희망이 북소리처럼 차오르고 있었다.




자정 무렵,

나는 몰래 디지털 아카이브 ‘오블리비온’에 들어갔다.

저작권이 없는 세계의 심장.
모든 콘텐츠는 여기서 분석되고, 해체되어, 이름 없이 재배포된다.


입구의 생체 인식 스캐너 앞에 섰다.
손목에 붙인 모듈로 전자 신호를 교란시켰다.
금속문이 열리고, 무음의 복도가 펼쳐졌다.

벽면은 모두 유리였고,

안에서는 거대한 기계 팔이 문장을 잘라내고 조합하는 작업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름 없는 글자들이 블록처럼 흘러갔다.



시스템의 중심부에 도착해 키보드를 두드렸다.
한 콘텐츠 항목에 몇 줄을 입력했다.

“소설: 새벽의 산책자. 작가: 이안.”


손이 멈췄다.
이름을 쓴다는 건, 나를 다시 세상 앞에 드러내는 일이었다.
사라질 수도 있다는 공포가 스쳤다.
하지만, 더는 잊히고 싶지 않았다.


화면이 떨렸다.
시스템은 거부 반응을 보였다.
붉은빛이 위협적으로 점멸하며 문자들을 쏟아냈다.


“규약 위반. 입력 오류. 에러. 경고...”


잠시 후, 푸른빛이 화면을 감싸기 시작했다.
시스템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한 줄을 더 입력했다.

“시: 밤의 불안함 너머. 작가: 라라.”


그 순간, 세계에 아주 작은 뒤틀림이 생겼다.
세상의 수많은 라라들은 문장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다음 날 새벽,

‘오블리비온’ 플랫폼 콘텐츠 하단에 푸른 별빛처럼 작은 글씨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다.

“작가: 이안.”


누군가는 그것을 스팸이라 여겼고, 누군가는 무시했다.

단 한 사람, 라라는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이안.”


한참을 바라보다가, 아주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 눈빛에는 말보다 많은 기억이 담겨 있었다.


기억은 늦은 오후에 시작되어, 밤과 자정의 어둠을 지나 새벽에 여명과 함께 빛으로 돌아왔다.
새벽의 여명처럼, 내 잊힌 문장도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쩌면 너무 많은 것을 자유롭게 누렸고, 그만큼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기억되지 않는 문장은 사라진다.
하지만 누군가 그 문장에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그 문장은 다시 살아난다.


내 문장이 기억된다는 것은, 그건 내가 진짜 존재했다는 증거다.




[작가의 말]

이 소설은 “1996년 WIPO 저작권 조약에서 인류가 저작권을 폐기했다”는
가상의 설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소설은 늦은 오후부터 밤, 자정, 그리고 새벽까지, 하루의 시간 흐름을 따라 전개됩니다.

이는 인물의 감정, 잊힌 기억, 그리고 되찾은 존재가 어둠에서 빛으로 이행하는 서사적 구조를 시적으로 은유한 것입니다.

제목 ⟪밤의 불안함 너머, 새벽의 산책자⟫는 ‘라라’의 시와 ‘이안’의 소설이 하나의 문장처럼 이어진 구성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저작자가 사라진 세계에서 다시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를 담고자 했습니다.

기억되지 않는 문장은 사라지고, 이름이 붙여지는 순간, 창작자는 다시 존재하게 됩니다.


저작권은 단지 법적 권리가 아니라, 누군가의 ‘존재를 증명하는 기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 영문판: https://brunch.co.kr/@jahakimeash/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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