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브런치는 <색연필 그림일기>로 시작했습니다. 신변잡기적 글을 쓰고 색연필 그림을 곁들였습니다. 저 좋아서 혼자 재미있게 그리고 썼습니다. 간혹 조회수가 많이 나오는 기분 좋은 경험도 했습니다.
브런치 작가가 된 처음엔 글을 먼저 쓰고 내용에 맞는 그림을 따로 그렸습니다. 때때로 그림이 먼저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글은 진즉에 써 놨는데 그에 맞는 그림을 그릴 수 없어서, 혹은 그렸는데 그림이 영 마음에 안 들어서 발행 버튼을 누르지 못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세상일은 언제나 나 좋은 대로 굴러가지는 않습니다. <색연필 그림일기>의 발행이 자꾸 미뤄지면서 부족한 재주를 탓하는 마음은 신발을 잃어버린 채 진흙길을 헤매는 꿈속처럼 괴로웠습니다. 글감을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림을 그릴 때는 아주 행운이었지요. 그림을 술술 잘 그려서 어느 글에나 맞는 그림을 그려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그림은 저 좋아 그릴지언정 재주가 미천한 것을요. 그러다 새로운 매거진을 생각해 냈습니다. 이 괴로움은 물론이고 그림을 그려야 글을 올릴 수 있는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 보려는 바람을 품고 <윤씨 잡문>이라는 제목으로 새 묶음을 만들었습니다.
처음엔 "윤씨 잡문"과 "객쩍은 소리" 두 개를 놓고 고민하다가 가족에게 물었습니다. 투표 결과 윤씨 잡문 쪽으로 기울어졌습니다. '객쩍다'라는 말은 아시다시피 싱거운 말과 행동을 뜻하는데 글 내용과 꼭 들어맞지 않을 수도 있다고 여겨졌고 글의 내용이나 형식이 잡문이니 잡문이 낫다 생각되었습니다. 익숙한 형식이기도 하지요.
"세상을 자세히 보면 할 말이 많아진다. 자기 삶이 자세히 보인다. 그 일상을 구체적으로 쓰면 글이고 그리면 그림이다." (김용택 시인)
맞는 말씀입니다. 일상에 대한 관찰과 가벼운 사색,그 이상이 되기를 바라지는않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자기 이야기를 해요. 좋은 일이죠. 자기 이야기만 한다고요. 아...... 그건 좋은 일이 아니네요. 그러면서 나도 내 이야기만 한다. 지겹다. 그렇다고 남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내 이야기를 할 때보다 남 이야기를 할 때 나를 더 많이 들킨다".(김지승, <짐승 일기> 중에서)
그렇군요. <윤씨잡문>은 또 하나의 다른 일기에 불과할 겁니다. 나의 꼼수이기도 합니다. 잡문이라고 연막을 쳐놓고 좀 편하게 놀아 보자, 하는 심사가 깔려 있으니까요. 잡문의 제약 없는 형식에 기대 결국 내 이야기를 하게 되겠지요. <색연필 그림일기>에서 색연필만 빠진 거잖아, 하는 생각도 들 테구요.
그래도 몇 가지 바람을 품어 봅니다.부디 제 능력으로 닿지 않는 멋진 글에 대한 마음을 나 스스로내려놓았으면 좋겠습니다.나의글이무겁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거운 건 내 몸무게로 충분하니까요. 지나간 시간과 기억이 두려움으로 쌓여 자꾸 나를 가두어 놓고 있습니다. 최근엔 특히 더 남들이 뭐라고 할까, 글쓰기가 두려웠습니다. 갈수록사람은 어렵고 세상은 두렵습니다. 어려움과두려움의 크기만큼 이것들을 풀어내고 싶다는 마음도 함께 있습니다.
글쓰기 선생님들의 공통된 말씀 중 하나가 일단 쓰라고 하더군요. 하여 나도 그저 써 보겠습니다. 선생님들 말씀은 들어야 합니다. 그들은 먼저 나아 간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분들 말씀을 들으면 자다가도 글 하나는 나올 거라고 믿습니다.
<윤씨 잡문>에 쓰이는 문체는 경어체로 정했습니다. 경어체는 본디 즐겨 쓰던 문체입니다. 알을 깨고 나온 새끼 오리는 처음 본 대상을 엄마 오리로 인지한다지요. 각인이라고 한답니다. 대학에 입학해 새로 접한 글들이 지금은 고인이 된 김윤식 교수와 김현 교수의 책들이었습니다. 또 신영복 선생의 문체도 다분 다분 들어와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분들의 문체가 내겐 오리의 각인이었습니다. 다시 그 경어체로 돌아오니 편안한 옷을 입은 기분입니다.
매거진에 실릴 이미지는 나와남편의 사진임을 밝힙니다. 남편은 오랫동안 사진을 찍었고 몇 번의 사진전도 가졌습니다. 무엇보다 나는 그의 사진에 담긴 색조와 분위기를 참 좋아합니다. 고맙게도기꺼이사진을 제공해 주어서 무척 감사합니다
물의 정원, 양수리 by 푸른 소나무
<윤씨 잡문>은 나를 또 어디로 데리고 갈까요. 가봤자 독자님들 손바닥이고 내 안과 그 언저리겠지만우리의일상은 남루하지 않다고 기록하고 싶습니다. 반복되는 오늘이 아니라 내 생에서 단 한 번도 살지 않은 새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길 바랍니다.새 날에도 나의 모순은 변함없겠지만 그대로 바라보고 축복하고 싶습니다.그러다 흔들리지 않는 평안이 한 번쯤 주어진다면 아주 행운일 거라 여길 겁니다. 발길에 차이며 아무도 탐내지 않는 길가의 돌멩이도 간혹 아주 예쁜 것이 있어 주머니에 넣는 것처럼 일상에서 반짝이는 작은 돌멩이 같은 글 한 줄 쓰이면 좋겠습니다.
나무들이 잎을 다 떨구어내니 빈 가지들 사이로 하늘이 잘 보입니다. 잎 떨어져 나간 자리에 하늘이 들어와 빈 가지 사이를 채우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잃어야 채울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텅 빈 것이 꽉 찬 충만이라는 진리를 다시 확인합니다.떨어져 나가야 할것들에서 놓여나가려져 볼 수 없었던나의하늘을 잘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읽어주실 분들께 깊이 허리 숙여 미리 감사 인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