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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윤씨 잡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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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 Dec 10. 2022

선생님께

<윤씨 잡문>


선생님,

날이 추워지고 있습니다. 건강은 어떠신지요. 선생님을 뵙고 온 친구들로부터 선생님께서 잔기침을 조금 하신다는 말을 전해 들었는데 지금은 좀 나아지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계신 곳이 산속이라 평지보다 추울텐데 다가올 겨울이 염려됩니다.


저는 늦은 가을 대관령 숲길을 걷고 왔습니다. 우리 소나무가 시원스레 뻗어있는 사이로 난 길을 걸으니 참 좋았습니다. 부슬비가 내려서 숲은 온통 소나무향으로 가득했습니다. 붉고 곧은 몸통이 하늘로 뻗어 올라간 소나무들을 보니 어찌나 귀하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이런 자연을 가꾼 강원도가 고마웠습니다. 저는 이런 숲에서 걸으며 머무는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좀 더 빨리 이토록 매력적인 걷기를 몰랐다는 것이 아쉽기만 합니다. 제 두 다리로 깊은 숲속을 걸어 다닐 수 있으니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언젠가 선생님께서 시절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며 멋이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숲길 근처 음식점에서 능이를 넣은 칼국수를 먹었습니다. 늦은 가을비가 내려서 따뜻한 칼국수가 아주 제격이었습니다. 능이를 넣은 칼국수를 먹으며 버섯을 좋아하셨던 선생님 생각이 났습니다. 4학년 가을 졸업여행 때 들른 송광사 근처의 전집에서 표고전을 맛있게 드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선생님께선 표고전을 아주 좋아한다고 하시며 버섯은 다 좋다고 하셨지요.


남부지방에 흩어져 있는 여러 사찰로 졸업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우리 모두는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릅니다. 기껏 절이나 보는 게 무슨 졸업여행이야. 무슨 과는 대만으로 간대. 하는 누군가의 소리를 들으신 선생님께서는 야, 사학과는 탁본 뜨러 이름도 모르는 산골에 갔어. 하시는 말씀에 우린 모두 웃고 말았지요. 우리가 보고 왔던 절집들이 유홍준 선생의 이야기에 나올 때마다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우리 저 곳에 갔었는데' 싶어서 말입니다. 조금만 건드려도 풋내가 나는 푸성귀처럼 풋내를 가득 품고 아무데서나 깔깔거리는 여자애들과 절집은 어울리지 않았지만 제가 지금 절집을 좋아하게 된 것이 그 졸업여행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때 저는 젊었고 우울했고 불안한 기대감에 꽉 차 있었습니다. 이후  친구들은 더러는 남의 나라에서 살고 더러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더러는 그저 살고 있습니다. 간혹 모임을 통해 만나던 친구들은 졸업 후 20년이 지나자 동창회에서 보내주던 학보가 끊기면서 친구들과도 소식이 끊겼습니다. 능이 국수를 먹으며 버섯에서 시작된 생각이 이리 흘러 왔습니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라면 단연코 싫다고 하겠으나 그 철없던 웃음들은 그립습니다. 소나무숲에서 놀다 돌아오니 집앞 단풍이 다 지고 산이 홀쭉해졌습니다. 잎이 져버린 쓸쓸한 풍경은 계절의 흐름이 가득해 마음을 울렁이게 합니다.


선생님 계신 곳엔 가을이 다 가고 초겨울이 시작되었겠지요. 선생님께서 좋아하신다 하셨던 11월입니다. 11월엔 계절처럼 생각이 깊어진다고 그래서 가벼이 말하거나 행동할 수 없다고 하셨지요. 저는 언제쯤 11월처럼 생각이며 행동이 깊은 사람이 될른지요. 요즘은 누군가 제 나이를 물으면 공연히 얼굴이 빨개집니다. 나이가 한 기준이 된다는 것이 참으로 두렵습니다.


대관령 소나무숲길 대통령 쉼터에서 바라 본

캠퍼스 잔디가 노랗게 될 무렵 저희는 졸업사진을 찍었었지요. 친구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저마다 작은 한숨과 함께 각자의 소회를 털어놓았습니다. 그 중 한 친구가 선생님처럼 대학에서 가르치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미 채점이 끝난 과제라도 제대로 끝내도록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고쳐오라 하셨던 선생님처럼 여유와 열정을 가진 선생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학교 대문을 지키고 있던 전경들에게 인사하시고 들어오시면서 이 슬픈 시절은 우리의 참여로 끝내야 하지 않겠냐고 하시던 선생님처럼 살아있는 양심으로 학생들 앞에 서고 싶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을 존경하던 우리는 친구의 말에 숙연해졌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우리는 진심으로 그 친구를 응원했고 그 친구는 지금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칩니다.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 큰 허물없이 사는 것은 선생님께 받은 가르침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 진실은 단순한 사실이다. 무엇이 본질인지 살펴라. 오늘 네 앞에 있는 사람을 대접해라. 삶은 녹록치 않으나 햇빛은 하루종일 비친다. 깊이 있게 사고하고 자연을 즐겨라. 다른 가치관을 입에 올리고 비교하면 친구를 잃는다. 투표는 공동체뿐 만 아니라 내 삶에 관여하는 것이다. 오래된 것은 아름답다.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친구, 마음이 같은 배우자, 자연을 즐기는 것 이 세 가지만으로도 세상은 살만하다. "

  

선생님,

뵌지가 오래 돼 마음이 허전합니다. 오늘 마트에 갔더니 모과가 있었습니다. 선생님 기침이 생각나 여러 개를 샀습니다. 에 잰 모과를 들고 조만간 찾아뵙고 싶습니다. 따뜻한 모과차 한 잔 마시며 선생님과 다정하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요즘은 그런 대화가 몹시 그립습니다. 차가워지는 날 몸 건강히 지내시길 빌겠습니다. 남편의 인사도 더불어 전해드립니다. 점심 산책때 주은 나뭇잎 두어 개 동봉합니다. 눈 가는데마다 깊은 가을이 꽉 차 있습니다.

선생님, 나날이 평안하시길 기원드립니다.


2022년 늦가을

제자 ooo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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