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 보는 tv 프로그램에 "자연의 철학자들"이 있습니다. 자본과 시장 논리에 맞지 않는 농사를 짓고 숲과 정원을 가꾸며 일상의 예술을 지향하는분들의 삶을 소개합니다. 여기 소개되는 분들은 자신만의 철학이 있고 친환경적인 삶을 산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평범하지만 놀랍습니다. 평범하다고 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도 살아갈 수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고 놀랍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선택 때문입니다. 누구나 살아갈 수 있는 삶이지만 사람들이 쉽게 선택하는 삶은 아닙니다. 나 또한 그들의 삶을 통해 많은 걸 배우지만 내 삶을 그들과 같은 선택으로 바꾸진 않으니까요.
최근의 이야기 중에서 내 마음을 크게 움직인 것은 김두리 씨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녀는 놀라운 사람이었습니다.
김두리 씨는 제주에서 두 딸과 네 마리의 말 -향이, 티파니, 알로에, 첼로를 키우며 삽니다. 말들을 훈련하고 치료하고 돌보며 삽니다. 말은 그녀의 반려동물입니다. 말이 반려동물이라구? 나도 개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만 그녀가 말들과 함께 사는 모습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기에 반려동물이 말이라는 것에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우연히 경마장에서 일을 한 경험을 계기로 그녀의 삶에 말이 들어왔고 그녀는 말들을 입양했습니다. 그리고 말들과 두 딸을 위해 제주도의 자연으로 터전을 옮겼습니다.
그녀는 말들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훈련을 꼽았습니다. 훈련을 통해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말하는 훈련은 그녀의 생각과 태도에서 비롯된 것인데 일방적 방법을 주입하고 반복 행동을 하도록 학습시키는 것이 아니라 말들의 고유한 성격과 개성에 맞추어 접근했습니다. 훈련 내용에 대해 말들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며 말들이 자신의 훈련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움직일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일방적인 방법을 선택하면 교육자는 편합니다. 자신의 계획과 정한 목표대로 끌고가면 되니까요. 이 때물리적인 힘이 사용되고 그 관계엔 우열이 생깁니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라면 대부분 인간이 우월한 위치에 서겠지요. 아시다시피 우월한 위치는 바로 권력의 위치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과의 관계에서 동물은 인간의 처분 아래 놓이게 됩니다.
김두리 씨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반려는 생각이나 행동을 함께 하는 짝이나 동무'라고 사전은 정의합니다. 말의 아픔 속으로 들어가 어루만지며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것이 목적인 그녀의 훈련은 당연하게도반려를 향한 것이지 우월한 위치에서 인간의 편리를 위한 행동을 학습시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와 다른 객체 또는 존재에게 공감하고 존중하는 모습은 당연한 것인데 왜 내겐 그 모습이 새삼스럽게 놀라웠을까요. 그 대상이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라서그랬을까요.
그녀는 말합니다. 말에게도 감정이 있으니 그 앞에서 함부로 행동하거나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녀가 돌보는 말 중에 향이가 있습니다. 함께 지내는 말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있고 매우 소심하며 예민합니다. 바스락 거리는 비닐봉지에도 놀라 펄쩍 뛰는 향이에게 그녀는 말합니다. 바람에 비닐봉지가 날릴 것을 엄마가 미처 생각 못했다고. 미안하다고. 그러면서 향이의 눈높이에맞추어 향이가 두려워하는 비닐봉지를 들고두려움을 극복하도록 시간을 주고 기다립니다. 향이의눈을 깊게 들여다 보고 얼굴을 쓰다듬고 귀에 대고 사랑을 속삭입니다.
"괜찮아. 천천히 해. 기다릴 수 있어. 무서웠지?"
그녀의 기다림과 마음이 향이에게 가 닿은 걸까요. 겁이 많은 향이는 망설이면서 천천히 앞발 하나를 바스락거리는 비닐봉지 위에 올려놓습니다. 다른 말들의 눈치를 보면서도 친해지기 위해 주변을 배회하며 다가서고 용기를 내 같은 건초를 먹어 봅니다. 그 옆엔 뜨겁고 깊은 응원을 보내는 엄마 김두리 씨가 있었습니다. 거칠 것 없는 질주의 본능을 가진 커다란 동물이 작은 비닐봉지 하나에 놀라고 겁먹는 모습을 보며 마음에 '징~'하며 물결이 일었습니다. 그리고 동물이라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말하고 거리낌 없이 행동한 나의 모습이 셀 수 없이 오버랩되었습니다. 그 많은 과오들을 아, 어쩌면 좋을까요.
예민한 말 향이가 동의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김두리 씨
나는 몰랐습니다. 몸집이 크고 빠르게 달리는 말들이 그토록 예민하고 온순하며 감정을 가진동물이라는 것을요.그렇습니다. 감정은 인간만의 것이 아닙니다. 말은 아주 풍부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심하게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내면의 아픔 때문에 분노하는가 하면 개구쟁이이며 상처를 잘 받고 매우 예민합니다. 친구를 사귀고 싶지만 자신의 성격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아이들이 말들 주위에서 마구 떠들고 장난을 치자 그녀는 말합니다. 조심해서 말하고 너무 크게 말하지 말라고. 말들이 안 듣는 것 같아도 다 듣고 있다고.
그녀의 말처럼 말들은 안 듣는 척하고 있었으나 눈동자는 끊임없이 뒤룩거리고 슬쩍슬쩍 아이들을 훔쳐보며 아이들에게로 신경이 가 있었습니다. 말들은 안 보는 척, 관심 없는 척 행동했으나 사실은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 말들의 모습은 사랑스러웠습니다. 말들은 까르륵 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기도 하면서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말을 듣느라 귀가 움직였습니다. 말들은 일반 사람들보다 천진하고 활발한 아이들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말들이 아이들을 좋아한다는 것은 말들의 성격이 아이들과 많이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천진한 아이들 같은 마음과 감정을 가진 말들에게 사람들은 너무 많은 상처를 주고 함부로 다루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함부로 대한 것이 말들 뿐이었을까요?
몸과 마음 모두 큰 아픔을 지닌 티파니
그녀의 말들 중에서 가장 아픈 손가락은 티파니입니다. 티파니는 20살 암말입니다. 경주마로 살았고 온갖 험한 일을 겪으며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새끼를 낳아야 했고 사람들의 욕망을 위해 뛰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의 편의에 따라 이리저리 취급당하고 이용당하다가 병을 얻자 버려졌습니다. 티파니는 자궁에 큰 병이 생겨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육체뿐 아니라 마음에도 병이 생겨 분노가 쌓였고 그 분노를 풀 길이 없어 매일 울타리를 걷어차느라 발과 다리를 자주 다칩니다. 그런 티파니가 김두리 씨는 가장 마음이 아픕니다. 인간들에게 시달리다가 끝내는 치명적인 병을 얻은 티파니가안타까워 그만 주저앉아 웁니다. 티파니의 얼굴에 손을 대고 볼을 대고 입을 맞추며 속삭입니다.
"많이 힘들지. 티파니 사랑해. 네 아픔 때문에 나도 아파. 울타리를 걷어차는 건 괜찮지만 네가 다치잖아."
타자의 아픔에 함께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말로 표현하는 것일까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일까요. 말이라면 어떤 내용이어야 할까요. 또 행동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나는 이런 일을 제대로 한 적이 있기나 한 걸까요. 내가 누군가에게 화가 나거나 실망했다면 그건 바로 그가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가 나를 알아주지 않은 것만이 문제일까요. 나는 그를 어떻게 알아주었을까요.
수개월 전 실패로 끝난 나의 관계 중 하나가 떠오릅니다. 돌이킬 수 없지만 지울 수 없는 관계고 벌어진 일입니다만 여전히 결말이 나지 않은 채로 나를 괴롭힙니다. 티파니에 대한 김두리 씨의 모습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깁니다. 이 관계에 그녀의 헌신이니 희생이니 하는 말들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내가 짧은 언어로 겨우 찾은 것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알아주는 것입니다. 공통된 의사소통 없이도 서로를 들여다 보고 압니다. 그리고 감정을 나눕니다. 감정은 나누는 거지 다투는 '꺼리'가 아닙니다. 나 아닌 다른 존재는 차이도 구별도 없이 그저 나와 같은 존재입니다. 나와 같은 감정을 가진 존재입니다. 우리가 아는 사실이지만 자주 잊어버리고 자주 놓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토록 자주 잊어 분노하고 스스로 상처받는 것을 되풀이 하나 봅니다.
그녀는 유방암 3기를 극복하고 있는 암환자입니다. 암 치료를 받는 중에도 말들의 밥을 챙기고 말들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돌보았습니다. 머리카락 한 올 남지 않은 모습으로 말들을 돌보는 마음과 행동은 어떤 것일까요. 티파니의 아픔 때문에 주저앉은 그녀를 어린 딸이 다가와 사랑과 슬픔이 가득 담긴 몸짓으로 엄마를 안아줍니다. 엄마의 머리와 어깨를 감싸곤 깊이 눈을 감습니다. 어린 딸의 몸은 작아서 엄마를 다 감싸지 못합니다. TV를 보던 나는 딸의 모자라는 두 팔에 보태고 싶었습니다. 어린 딸의 행동은 김두리 씨가 말들에게 하는 바로 그 모습입니다. 나는 이 장면에서 결국 울었습니다. 향이를 대하는 그녀의 모습에서도 티파니에게 입을 맞출 때의 모습에서도 참아두었던 눈물이 그만 흐르고 말았습니다. '사랑은 저렇게 가르치는 거구나. 저렇게 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넘쳐 밖으로 흘렀습니다.
"모든 이와의 만남은 나와의 만남이다"
"위로가 필요하면 누군가의 마음에 귀를 기울여 보라."
최근 들어 나는 다른 존재에 대해 그녀처럼 우아하고 품위 있는 태도를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최근 들어 나에게 습관적 성찰과 깨달음을 넘어서게 하는 가르침을 준 사람이 없습니다. 말들에 대한 그녀의 행동을 연민이랄지 동정이랄지 사랑이랄지 한 단어로 표현하는 것은 부족합니다. 그녀의 삶이 연민이든 사랑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어린 딸의 행동을 통해 드러났고 나에게로 전해졌습니다.
그녀에게 가서 아, 나도 한 마리 그녀의 말이 되고 싶습니다. 그녀의 진정어린 손길에 나를 맡기고 싶습니다. 존재의 깊은데서 나오는 진심이 다른 존재의 깊은 곳과 만나는 그런감정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러고 나면 그녀의 어린 딸처럼 나아닌 다른 존재를 다름이나 차이의 구별 없이 편협한 판단 없이 기꺼이 끌어 안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녀와 말들은 지금 평안할까요? 그녀와 티파니의 병은 호전이 되었을까요?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과 말들이 소소한 일상 안에서 내내 평안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그랬으면 좋겠습니다.
(* 이 내용은 KBS "자연의 철학자들" 34회 방영분입니다. 인용된 사진은 KBS에서 빌려왔습니다. 일부 인물의 말은 간단히 재구성한 부분도 있음을 아울러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