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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윤씨 잡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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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 Dec 20. 2022

"허무한 듸!"

<윤씨 잡문>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고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듸!' 독은 차서 무얼 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


김영랑 시인의 <독을 차고>입니다.


수능이 코앞이던 어느 날, 학생들과 기출문제로 나온 이 시를 풀어야 했던 날이 있었습니다. 수능 피로도가 절정에 이른 교실은 그야말로 태풍의 눈으로 언제든 무언가가 터질 걸 기다리는 듯했습니다. 나는 불현듯 이 시를 낭송하고 싶었습니다. 학생들이 앉아 있는 책상 사이를 오가며 시를 읊조리다가 "아! 나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에서 그만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그런 내 모습에 아이들도 당황했지만 나는 더 당황스러웠습니다.


민망하게도 터진 눈물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너무 창피했습니다. 아이들은 나의 모습에 놀라저희들끼리 알 수 없는 눈빛을 주고받았고 나는 눈물을 수습하느라 칠판을 향해 몸을 돌렸니다. 그런데 등 뒤에서 몇몇 아이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때야말로 진짜 당황스러웠습니다. 순간 내 눈물은 게눈처럼 쏙 들어갔고 나는 뭐 이렇게까지 남의 눈물에 공감해 주냐며 '이런 훌륭한 인격들 같으니' 하는 농담으로 상황을 슬쩍 버무렸습니다.


잠시 후 우린 서로 마주 보며 어색하게 웃었습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내가 왜 울었는지 설명하긴 힘들지만 나는 이 시를 좋아한다. 문제를 풀기 위한 읽기가 아니라 감상을 위한 낭송이 하고 싶었다. 시는 읽는 것이 아니니까. 쌤은 마음이 힘들 때 이 시를 암송하곤 다. 너희들에게도 그런 시들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노래부르듯 시도 하나나 둘 쯤 외워놓고 필요할 때 암송해 라. 생각보다 큰 힘과 위로를 받는다. 시는 특정한 사람들만 향유하는 애매모호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내 가슴 한 부분에  울게도 하고 웃게도 하며 나를 성장하게 하는 그런 거다. 시에는 그런 힘이 있다. 모름지기 시는 그런 거다. 나중에 어떤 실력 좋은?(ㅎㅎ) 국어 선생이 있었는데 시를 읊다가 울더라, 하며 날 떠올려 주는 것도 너희의 멋진 기억이 아니겠냐며 너스레를 떨었지요.


그러자 한 아이가 자신은 "허무한 듸!" 하는 구절에서 울컥했노라고 말했습니다. 그 아이의 수줍은 고백에 용기를 냈는지 아직도 빨개진 눈을 껌벅거리고 있던 또 다른 아이가.'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흑.. 원망 않고 보낸  흑...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에서 마음이 움직였다고 울먹였습니다. 그날 우리는 저마다의 이유를 품은 채 눌러두었던 어떤 것들이 눈물이 되어 나왔던 것 같습니다. 시를 읽고 눈물을 흘림으로써 공감하고 위로가 되었던 겁니다. 우리는 갑자기 동지애가 싹터 "선생님이 쏜다"며 수능 후 치맥을 하기로 굳은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과 12월 말쯤 신촌생맥주집에서 치맥을 했습니다.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이 시를 떠올리는 날은 대개 기분 좋은 날은 아닙니다. 아침에 일어났지만 하루가 무의미하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해야 할 일들이 귀찮고 번잡스럽게 생각되는 날이 있습니다. 생활의 의무가 무겁게 다가오고 세상에 내던져진 나의 생애가 가여울 때가 있습니다. 언제까지 살아야 하지? 싫증이 나 견딜 수가 없는 날이 있습니다. 마음이 외롭거나 자꾸 더 세상과 멀어지고 싶을 때, 나를 위한다는 말들로 더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에게 지치는 그런 날, 나는 이 시를 읊조립니다.


독을 찬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각오를 다지거나 굳은 마음을 품고 꺾인 무릎을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칫 세태에 휩쓸려 방향을 잃을 수도 있는 나를 지키는 것이 독을 찬다는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벗은 무서운 독을 그만 흩어버리라고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벗)은 그렇게 말합니다. 그냥 흘러가라고. 골치 아프게 묻지 말라고. 내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더 열심히 불변의 진리인양 말합니다. '참고 살아. 열심히 노력하면 안 되는 거 없어. 성공한 사람들을 봐. 너도 할 수 있어. 우리도 하면 돼. 왜 유난이지? 너만 힘든 거 아냐. 원래 그런 게 세상이야. 둥글둥글 좋은 게 좋은 거여'. 


오, 아닙니다. 자신도 증명하지 못한 증거 불충분의 말 대신 차라리 가슴에 품은 시 하나가 있느냐 물어주면 좋겠습니다. 위로인지 비난인지 비판인지 구별할 수 없는 말로 침 튀기지 말고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 한자락 들려주는 것이  낫습니다. 만일 품은 시나 노래가 없다면 말없이 술잔을 채워주는 것이 훨씬 나은 일이 아닐런지요.


사람들이 어떻게 참는지가 내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와 나의 실존이 더 비루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보다 나의 아픔을 제대로 알 때 남의 아픔을 조금은 알 있었습니다. 내 아픔에 아는 척하는 것도 달갑지 않지만 내 아픔을 자신들의 기준으로 이리저리 꿰어 맞추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위로라 믿는 그것이 내겐 비난이 될 때가 더 많았고 '나는 더 아팠다'며 '너 이렇게 아파 봤어?' 목에 힘을 주는 그 말 때문에 주저앉곤 했습니다. 우리는 위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걸까요? 누구나 아프면 힘이 듭니다. '늙으면 원래 그래. 나이 들면 서러운 일이 많아. 그러려니 해.' 하는 말들은 얼마나  쓸쓸한 말인지. 원래 그러긴 뭐가 원래 그런 건지 모르겠으나 원래 그런 것들은 없습니다.


아이들이 내 눈물을 보고 제 아픔을 드러내며 울었던 것처럼 '선생님, 울지 마세요', '나는 더 아파요'가 아닌 '선생님, 나도 아파요. 선생님 눈물을 보니 선생님도 나처럼 아프시구나 싶어서 아파요.' 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위로가 아니겠습니까. '너도 아프구나. 나도 아파. 우리 둘 다 아파서 가엾구나. 난 힘들 때 이런 노래를 불러. 들어볼래?' 하며 살펴주는 마음이 위로가 아니겠습니까. 아픈 마음을 가지고 저울질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더 아프니까 너 명함도 내밀지 마' 하는 불행 배틀은 더 큰 불행을 안길 뿐입니다. 그건 참 사나운 마음입니다.


시가 생각나는 날은 일정 구간을 반복하는 고장 난 음반처럼 몇 번이고 암송을 합니다. 그러다 보면 마지막 연에서 힘주어 외치게 됩니다.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이상하지요. 이 구절을 외우다 보면 힘이 납니다. 삶의 엄정함을 느끼며 나를 다독이고 "그까이꺼" 하게 됩니다. "허무한 듸!" 그러나 "그까이꺼" 하며 꺾인 무릎을 세우고 일어나 갑니다. 살아보니 그런 것이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시를 읽다가 주책맞게 울어버린 그날, 아이들과 특별한 감정을 나누었던 그날은 "허무한듸!"에 마음이 아파 울었지만 그 기억은 허무하지 않은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젠 더러 결혼들도 하고 자신의 삶에서 뿌리를 내리며 각자의 생의 기쁨과 슬픔의 시간을 살아내고 있을 아이들이 궁금해집니다. 잘들 지내고 있겠지요. "허무한!" 그러나 삶은 살아내는 사람의 선택에 따라 그 결이 달라지고 그저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니 "허무한듸!" 그러나 "그까이꺼" 하면서 '독을 차고 선선히' 가라고, 이 한 세상 잘 지나가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위로한다며 사실은 날 비난하는 그들도 외로운 이들이거늘 그들을 '독으로 해하진 말라고' 그래야 '막음 날 내 혼을 건질 수 있으니' '선선히' 잘 지나가자고 그 아이들을 달래고 나를 달래 봅니다. 그날처럼 말입니다.



2022년 가을 남이섬,by E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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