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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 Jun 27. 2023

창 멍

투투 이야기


한바탕 비가 쏟아지니 앞산의 초록이 더 푸르다. 진한 초록의 녹음을 이루는 산은  그 빛깔만큼의 깊이가 느껴진다. 그 깊이는 때로 심연 같아 가늠할 수 없는 공간이 되기도 하고 어느 철학자의 어두운 슬픔 같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어떤 이의 속내 같기도 하다. 내가 보는 그런 풍경을 투투는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 것일까. 내가 정의한 그 시선에 갇혀 바라보는 나와 달리 바깥을 내다보는 투투의 길고 먼 눈동자엔 어떤 것도 의도한 바 없이 그저 바라보는 것 같다. 생각과 감각을  배제한 바라봄이 온전한 '멍'이 아닐까.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투투를 보며 투투가 눈에 담는 것이 무엇일까 궁금하다. 녀석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지만 녹색의 그림자만 어른거릴 뿐 알 수가 없다. 얼굴 가까이 전화기를 들이대며 카메라를 찍는대도 못 본 척. 반응이 없다. 녀석, 찍히는 데 익숙해진 거니? 마치 일부러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프로 모델 같구나.


비가 내리면 투투는 우비를 입는 것이 싫은 건지 밖에 나가려 하지 않는다. 하루에 서너 번은 밖에 나가 볼일도 보고 산책도 하는 투투가 비가 내리면 머믓거리고 거부한다. 실내에선 볼일을 보지 않는 투투는 짧게는 6시간, 길게는 12시간을 참는다. 성견들은 12시간 이상도 배변을 참는다는데, 성견이 된 투투도 괜찮은 걸까.


잠깐씩 비가 그치면 급하게 나가 볼일을 보고 서둘러 다시 들어오면 투투는 저런 눈빛을 하고 창 멍을 한다. 옆에서 바라보는 투투의 눈빛이 묘하다. 투투,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자연의 섭리, 아니면 제 존재의 근원에 대해 생각하니? 그도 아니면 산책 갔던 앞산을 바라보며 그때를 그리워하니? 너의 눈은 깊은 사유를 담은 것고 세상을 통찰하는 눈 같기도 하고 비 많은 계절을 걱정하는 눈 같기도 하구나. 


이런 엄마를 보고 세상이 비웃겠지? 개 한 마리 키우며 오버한다고. 그런데 투투야, 세상의 많은 투투들이 그저 한 마리의 개에 불과하지 않다는 건 이미 세상도 알아. 우리가 인간이라는 이유로 그 어떤 생명과 존재 앞에서 우월할 수는 없단다.


고려말의 문인 이규보는 이런 글을 썼어. 개의 죽음은 아프고 이의 죽음은 하찮은 것인가. 개는 큰 동물이어서 그 죽음이 안 됐고 이는 작은 것이라 그 죽음이 당연한 것이냐고. 개나 이의 죽음은 같은 것이라며 크기에 따라 생명과 죽음을 판단하는 인간의 편견을 경계했지.

(이규보, <슬견설> 인용)


프로 모델 투투,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투투의 창 멍과 엄마의 투투 멍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시간아주 적막하다. 우리를 둘러싼 공간이 빛과 소음이 닿지 않는 깊은 물속 같은 시간이 된. 적막함 속에서 투투와 엄마의 눈이 마주치면 투투는 꼬리를 흔들고 엄마는 투투 볼에 뽀뽀를 한다. 투투는 당연하고 익숙하게 엄마의 뽀뽀를 받으면서도 눈은 여전히 바깥을 향하고 있다.


투투야, 우리 기원을 담자꾸나. 비가 너무 많이 내리지 않기를... 비로 인해 세상이 무너지지 않기를... 하늘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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