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 앞 빨간 벤치

어반 스케치 그리고 쓰다

by Eli

ATM에서 돈을 뽑거나 자장면을 먹으려면 이 가게를 지나가야 한다. 가게 맞은편에는 잔치 국숫집이 있고 그 옆으론 카페가 있었다. 잔치 국수는 5000원에서 6000원으로, 비빔국수는 6000원에서 7000원으로 올랐고 입맛에 맞던 카페는 옷집으로 변했다. 그동안 국수를 자주 사 먹었는데 격이 오른 후에는 예전처럼 맛있다고 느껴지지 않아서 요즘은 가끔 자장면에 탕수육을 먹으러 간다.


해가 너무 뜨거워 고개를 숙이고 걷다가 빨간색이 눈에 들어왔다. 페인트칠을 한지 얼마되지 않아 쨍한 빨간색 벤치가 쨍한 햇빛을 받고 있었다. 머리를 들어보니 양꼬치집이다. 우리 동네에 양꼬치 집이 있었나? 양고기 안 먹잖아요. 회, 생선, 양고기, 말고기, 홍어, 바퀴벌레 빼고 다 먹어요. 친구들이 웃는다. 길을 건넌 후 자장면집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고 보니 빨간 벤치 옆에 분홍색 가로등이 서 있다. 양꼬치 식당 사장님의 취향인가 보다. 빨간 벤치만 보이고 분홍색 가로등은 보지 못했다.

빨간 벤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식당도 분홍색 가로등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내 관심사 밖이거나 취향을 건드리지 않는 것은 보여도 보지 못하고 들려도 듣지 못한다.


깻잎 두어 장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깻잎 하나 사려고 마트에 가긴 싫어서 입맛을 다시니 뒷밭에 깻잎이 하나 있다고 했다. 파밭 옆으로 웃자란 키 큰 깻잎이 손바닥만 한 잎들을 달고 있었다. 심지도 않은 깻잎이 어디선가 나온 것인데 매일 밭에 가면서도 나는 깻잎을 보지 못했다. 심지 않았으니 당연히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처음 이사 온 집은 50년 가까이 된 한옥집이었는데 주변이 모두 논이었다. 모내기를 한 논에선 개구리들이 울었다. 개구리 소리는 밤에 더 심했는데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 3년이 흐르고 집에 놀러 온 손님들이 아침에 일어나 개구리 소리 때문에 자지 못했다는 하소연을 했다. 개구리? 개구리는 밤새 울었지만 그 소리에 익숙했던 나는 무시하고 듣지 않았던 것이다.


감각이라는 게 그렇다. 인식되기 전엔 감각되지 않는다. 눈에 들어와도 귀에 들려도 내가 대상을 인식하지 않으면 볼 수 없고 들리지 않는다.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에도 많은 오류와 왜곡이 음을 종종 경험한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열심히 그렸는데 어딘가 많이 이상하다. 본 것을 관념대로 해석하면 손은 그것을 따라간다. 직육면체를 그려보면 이 말을 이해하게 된다. 우유팩이나 잉크가 든 작은 상자를 처음 그려놓고 보면 이상하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의 눈높이를 무시하고 우유팩은 사각형이니까, 벽에 걸린 시계는 동그란 원이니까 하며 판단한다. 내 마음대로 보는 것이다. 때론 감각을 때론 관념과 인식을 무시해야 상하지 않은 그림을 겨우 그릴 수 있다.


그림 재주보다 말재주가 앞서버렸다. 섣부른 무당이라 그렇다. 나는 이제 겨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성공하는 그림보다 실패할 때가 더 많다. 아니 매 번 실패하거나 어느 한 부분 잘못 그리는 일이 비일비재한다. 어느 때는 내 맘대로 그려서 이상하고 어느 때는 너무 정직하게 그려서 이상하다. 보인다고 다 그려도 이상하고 안 보인다고 대충 뭉개버려도 이상하다. 고정된 시선과 재주는 피해야 한다. 그림 그리는 일도 자주 변하는 생물체와 같다. 그래서 어렵고 그래서 재미있다.


동네를 걷다가 발견한 빨간 벤치와 분홍색 가로등이 햇빛에 반짝였다. 그동안 보지 못하던 동네 풍경을 처음 그려 본다. 파일럿트 세일러 만년필 EF촉으로 스케치했다. 다른 펜에 비해 선이 가늘게 나오고 잉크가 번지지 않아 마음에 들었다.




18×24cm, 파브리아노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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