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연필 그림일기 2
시계를 보니 6시 15분. 타임 루프에라도 걸린 걸까. 알람을 설정한 것도 아닌데 눈을 뜨면 6시 15분. 비교적 늦게 잠자리에 들고 늦게 일어나는 편이었는데 이젠 잠든 시간과 상관없이 눈을 뜨는 시간은 항상 6시 15분이다. 날씨를 확인하고 간밤에 메모해 둔 것들을 살펴본다. 7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뉴스를 훑어보던 남편은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한다.
남편은 잠이 많은데 요즘은 5시에 깬다. 저절로 눈이 떠진단다. 잠이 깨면 누운 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가 내가 일어나는 7시쯤 다시 잠이 든다. 그래서 늦게 일어난다. 왜 꼭 5시에 깨냐고 물으니 나이 먹어서 그렇단다. 나이 때문이라면 오히려 5시에 일어나 움직여야 하는 거 아냐? 7시쯤 되면 졸려서 다시 자야 돼. 어...., 그래. 중간에 깨지 말고 쭉 자야 하는데 나이를 먹으니 저절로 일찍 눈이 떠지고.... 괴롭겠다. 남편은 평생 먼 길을 다니느라 늦잠을 잔 적이 없다. 5시에 깨면 곧장 일어나서 책도 읽고 아침 산책도 하고 텃밭에 물도 주고 하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들을 하면 안 된다. 그러면 남편이 미워진다. 그런 생각이 드는 사람이 그냥 하면 된다. 그래야 잘 지낼 수 있다. 누군가 나에게 5시에 눈을 뜨면 곧장 일어나 운동도 하고 텃밭에 물도 주고 책도 읽고 그래라, 하면 눈을 흘겨 줄 것이다. 남에게 바라는 것이 적어야 남도 나에게 무얼 바라지 않아 편해진다.
댕댕이 투투와 아침 산책을 나간다. 앞집에 사는 조그만 댕댕이가 투투만 나가면 "옥옥" 거리고 짖는다. 앞집의 개는 늙어서 소리를 낼 수가 없다. 그래서 "옥옥옥"하며 목 안에서 잠긴 소리로 짖는다. 투투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다. 들어오다 보니 잔디가 그새 또 자랐다. 잔디가 길면 더 덥게 느껴져서 예초기를 꺼냈다. 윙~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잔디가 깎인다. 좁은 면적이라 10여 분이면 다 깎는다. 금세 땀이 줄줄 흘렀다. 예초기 날이 멀쩡히 살아있어 대문 밖 풀을 베고 있는데 동네 산책을 다녀오는 윗집 부인이 한 마디 한다.
"아니, 남자가 해야지, 그걸 여자가 해요?"
"네~ 저는 여잔데 예초기도 돌려요."
"사장님 어디 가셨어요?"
"아뇨, 집에 있어요. 뭐 하실 말씀이라도...."
"잉? 무슨 할 말이 있다고 그래요? 선생님이 예초기 돌리는 걸 보니 바깥 사장님이 바쁘신가 해서 물어본 거지요. 쯧쯧"
물론 윗집 부인의 말을 못 알아들어서 남편에게 할 말이 있냐고 물은 것이 아니다. 남녀의 일이 구분되어 있다고 믿으며 여자가 예초기를 돌린다고 "쯧쯧" 혀 차는 소리 하는 게 맘에 들지 않아서 못 알아듣는 척한 거였다. 아마도 남편은 예초기 소리를 듣고 느릿느릿 일어나 침대를 정리하고 밤 사이 생긴 설거지를 하고 있을 거였다. 그러면 어떤가.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거지. 게다가 길게 자란 잔디나 풀을 깎는 일이 얼마나 큰 즐거움인데. 흠뻑 땀을 흘리며 주변이 깔끔해지는 그 희열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스트레스 날리는데 그만이다.
남편이 닭곰탕이 먹고 싶다고 해서 압력솥에 닭을 안치고 태블릿 앞에 앉아 글을 썼다. "칙칙 칙칙" 닭 익는 냄새가 퍼진다. 흐물하게 익은 닭고기살을 발라 파, 마늘, 후추, 소금, 참치액으로 양념을 한 후 그릇에 듬뿍 담아 국물을 붓는다. 크게 밥 한 술 말아 아침을 먹었다. 엄마에게 배운 우리 집 보양식이다.
" 중복이 지났는데 이제 닭고기를 먹네."
" 말복날 먹을 걸 미리 당겨 먹는다고 생각해."
"......... 아침을 다 먹네. 수영 안 가?"
"오늘 안 가. 브런치 공동 글쓰기 하는 거 오늘까지 써야 돼."
밥 먹은 설거지는 언제부터인지 남편이 주로 하고 나는 태블릿 앞에 앉아 글을 쓴다. 설거지를 끝낸 남편이 수박을 담은 접시를 쓱 밀어준다. 수박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보니 책을 읽나 싶던 남편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바보같이 웃고 있다.
"봉구 일기라고, 개가 나오는 건데, 큭큭 너무 웃겨."
"바보 같아."
"큭큭큭, 진짜 웃긴다니까."
"바보"
"큭큭큭, 보여줄까?"
"아니"
무표정한 모습으로 늘 화난 사람 같았는데 놀고먹으니 좋은가 보다. 요즘 남편은 자주 웃는다. 어떨 땐 바보 같다. 막혔던 글이 조금 뚫려 겨우 쓰고 있는데 점심 뭐 먹냐고 묻는 남편. 꼭 먹어야 돼? 이 말은 당신이 알아서 먹으라는 뜻. 알았어. 대충 먹지 뭐. 시계를 보니 2시가 넘었다. 대충 먹겠다는 소리에 또 글이 막힌다. 비빔국수 해 줄게. 오이 2개를 따다가 채 썰어 양념하는 동안 남편은 국수를 삶았다. 설거지를 끝낸 남편은 도서관에 들러 책을 반납하고 장을 봐 오겠다길래 어서 그러라고 등 떠밀어 내보냈다. 근처 공원을 한 바퀴 돌며 운동까지 하고 오려면 두어 시간이 넘어 집에 올 것이다. 남편이 나가니 막혔던 글이 잘 써진다. 일부러 나갔나??? 장을 봐 온 남편은 친구에게 가서 하룻밤 자고 오겠다고 나가고 나는 글에 맞는 그림을 그렸다.
정년 한 부부는 이렇게 놀고먹는다. 논다는 것이 아무 일도 안 하는 게 아니다. 놀고먹지만 하루가 바쁘다. 예전에 하지 못했던 예초기도 돌리고 예전에 하지 않던 설거지를 한다. 예전에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자전거를 함께 타고 시간이 없어 할 수 없었던 수영을 매일 한다. 언젠가 할 거야,라며 생각만 하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잘 웃지 않아 늘 오해를 사던 사람이 바보처럼 웃는다. 사정을 모르는 남들은 돈이 좀 있어서 아무 일도 안 하고 놀고먹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예전 수입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연금으로 간단히 먹고 적게 소비하면서 늘 나중으로 미뤄 두기만 했던 일들을 더는 미루지 않고 산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과 돈은 크게 관련이 없다. 배송된 실링팬을 한 달이 넘도록 달지 않아도 싸우지 않는다. 그럴 시간이 없다. 나는 나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각자, 때로는 함께, 하고 싶은 일을 하기에도 바쁘다.
이번 주말엔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트리거'를 한꺼번에 다 보기로 했다. (남편은 김남길을 좋아한다. 그를 배우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열혈 사제로 보기 때문이다.) 과연 다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잠이 많은 남편은 보다가 들어가 잘 것이고 나는 그림을 그리거나 하며 딴짓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퇴직한 부부의 놀고먹는 하루는 특별한 일이 없는데도 일이 무척 많다. 마음먹은 대로 세상의 흐름과 상관없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우리에게 많지 않다. 그 시간은 아무 때나 허락되지 않는다. 젊은 날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잘 모른 채 휩쓸려 살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나이가 되었을 땐 그것을 할 줄 몰라 눈먼 시간을 살게 된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을 꾸준히 지향하면 그 일이 나를 붙잡아 살아있게 한다. 점이 모여 끝없는 실선이 되고 여러 가지 형태의 도형을 이루듯, 작은 순간을 살 때 나는 불만이나 슬픔, 실망이나 허황된 꿈으로 나를 소모하지 않고 진정으로 살게 된다. 매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허락된 그 순간을 즐기는 것이다. 그때가 우리 부부에겐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