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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파티

색연필 그림일기 2

by Eli

62번째 생일이었다. 친구들은 한 달 전부터 내게 줄 수영복을 미리 주문하며 나의 생일 축하를 준비했다. 수영복과 시계, 노화방지 크림과 선크림, 노란 장미 꽃다발과 청포도 케이크, M 씨의 어머니 강여사님께서 만드신 미역국이 선물이었다. 꽃다발 안에는 로또가 한 장 들어있었다.


평소 음식을 잘 만들지 않는 S 씨는 요리에 서툴다. 그런 S 씨가 멜론을 썰고 햄과 치즈를 꺼내 맛있는 안주를 만들고 커피를 내려주었으며 술을 따라주었다. H 씨와 집주인 M 씨는 더위를 뚫고 케이크와 꽃다발을 사 왔고 강여사님은 이 더위에 호박전을 부치고 진한 미역국을 끓여주었다. 이 무슨 호사냐. 친구들은 더위 타는 나를 위해 에어컨을 강으로 틀고 그것도 모자라 선풍기를 나 혼자 독점하도록 했다. 생일자는 자리에 앉아있으라며 분주히 자기네들끼리 상을 차렸다. 나란히 싱크대 앞에 서서 사이좋게 움직이는 세 명의 친구들 뒷모습은 즐거워 보였다. 사람의 마음은 때로 뒷모습에 더 잘 나타난다. 친구들의 등을 바라보며 나는 행복했다.


하지만 생일 축하를 받는 일은 여전히 익숙하지가 않다. 왜일까. 나는 무언가를 도우려고 했지만 친구들은 앉아서 받기만 하라고 했다. 앉아서 받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일일 줄이야. 많이 불편하고 민망했다. 무엇을 받기만 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다. 그랬다. 주는 것이 편하지 받는 것은 영 힘들다. 푸짐한 상을 차려놓고 초를 끄고 선물을 받고 하는 일이 언제였는지, 생일 미역국을 받아 본 것도 오래 돼 기억 나지 않는다. 익숙함은 빈도와 비례한다. 주인공이 되어 축하받는 일이 많지 않았으니 당연히 불편할 수밖에.


미역국을 한 대접 먹고 나서 S 씨가 축하노래를 불러주겠다고 했다.

"... 이대로 내 곁에 있어야 해요/나를 떠나면 안 돼요/세상의 모든 걸 잃어도 괜찮아요/그대만 있다면 그대만 있다면...."

S씨가 가져온 블루투스 스피커 아래 부분에선 현란한 불빛이 아롱다롱 반짝거렸다. 불빛이 집 천장과 벽, 친구들 눈에서 반짝거렸다.

"영원히 내 곁을 지켜주세요/나를 떠나지 말아요/세상의 모든 걸 잃어도 난 좋아요/ 그대만 있다면 그대만 있다면....."

너드 커넥션의 노래였다.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는 친구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상에 둘러앉은 다른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일상의 자잘한 것들을 나누며 서로에게 맘을 튼 지 고작 3년인데 우리는 진심을 다하며 다정한 마음을 표현하고 서로 아끼고 있었다.

"우리가 벗고 만나서 그래."

매일 수영을 함께 하기 때문에 벗고 만난다는 말이었다. 남자들은 술 한 잔 마시고 사우나에 간 다음에 친해지고 여자들은 친해져야 사우나에 가는데 우리는 친해지기 전부터 매일 수영장에서 만났으니 3년이라는 밀도 높은 시간은 더 긴 시간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벗고 만나는 사이는 더 무엇을 감추고 말고 할 것이 없다. 서로의 벌거벗은 모습을 통해 깊은 곳의 수술자국, 아팠던 기억과 상처들을 고스란히 알게 된다. 관계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들 때문에 마음을 굳게 닫은 채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나 잘 하자, 더 누구를 사귀냐며 나는 극도로 관계를 피해왔다. 친구들도 비슷했다. 그러나 친구들이 하는 말처럼 "벗고 만나는 사이"는 다른가 보다. 뭐, 별다른 게 있겠어? 또 상처 받는 멍청한 일이나 당하지 말아야지, 하던 마음은 모두 물에서 풀어지고 녹아 없어졌다.


휴일 저녁에 뭐 하냐며 느닷없이 만나 팥빙수를 먹을 수 있는 친구들. 밤늦은 시간에 술 한 잔 함께 하고 싶은 친구들. 갓 따 온 옥수수를 삶았다며 뜨거운 김이 채 식기도 전에 가깝지 않은 거리를 오가며 옥수수보다 더 뜨끈한 마음을 주고 가는 친구들이 곁에 있어 감사하다. 그 옥수수는 참으로 맛있었다. 가족들보다 앞서 생일을 축하해 준 친구들. 고맙고 고맙다. 받은 로또가 도깨비 방망이가 되면 거하게 쏘리라 했는데 꽝이 되고 말았다. (아까비~) 그러나 우리는 서로에게 꽝이 아니니 얼마나 운이 좋은가.

"그대만 있다면 그대만 있다면"

8월에 우리는 서로를 믿고 응원하며 함께 한강을 건널 것이다.

그땐 내가 안주를 마련하여 하이볼을 말아줘야겠다. 축복의 꽃다발과 함께.



친구들의 축하 꽃다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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