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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크보다 좋은 건 껴안는 거야

필사하며 나누며

by Eli




* 이 매거진은 fragancia 작가님의 필사 모임에서 제공된 자료를 토대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 이 매거진은 fragancia 작가님과 공동으로 하는 글쓰기입니다. 이 글쓰기의 목적은 필사 문장을 다시 음미하고 확장하려는데 있습니다.





사람들은 스쳐 지나가면서 서로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어쩌면 '어른'은 우연히 자기 바로 앞에 선 작은 영혼에게 그때 당면한 최선을 다 해 주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일을 계속하는 모습을 그저 보여 주는 사람일지 모른다. 멘토라는 말은 흔하지만 스스로 멘토가 되고자 한다고 멘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단숨에 드러나지 않지만 말없이 삶으로 보여주는 수많은 멘토가 있다.

앞선 모든 사람과 모든 작업이 선생이다. 때로는 반동도 동력이 된다.

-만질 수 있는 생각, <이수지> -


질문 : 저자는 그림책 작가입니다. 애정하는 그림책 한 권을 소개해 주세요.







"사람들은 스쳐 지나가면서 서로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마음이 어수선하거나 궁핍해질 때 곁에 두고 읽는 책이 서너 권 있는데 그중 하나가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라는 그림책이다. 찰리 매커시란 사람이 글과 함께 그림을 그렸고 이진경 번역가가 옮겼다. 지금 쓰는 이 글은 어쩔 수 없이 책의 내용을 고스란히 옮길 수밖에 없겠다. 이 글을 읽고 책을 읽어야겠다고 결심하면 더 좋겠다. 저자나 출판사로부터 광고를 부탁받은 것이 아니니 오해는 하지 않기를. 이 사랑스러운 그림책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친절한 어른"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나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후 소장해야겠다고 생각해서 구매를 한 후 여러 번 다시 읽었다. 이 책은 첫 장부터 마음을 건드린다.


"당신은 첫 장부터 읽는군요. 인상적입니다."

"사실 저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림은 언어의 바다를 통과해야 닿을 수 있는 섬과 같습니다."

"이 책은 여덟 살이든 여든 살이든 누구라도 읽을 수 있습니다. 저 또한 때로는 여덟 살이기도 때로는 여든 살이기도 합니다."

"제 생각에 거친 들판은 삶과 닮았습니다. 때로는 두렵지만 아름답다는 점에서."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소년은 집을 찾아가는 길에 두더지와 여우와 말을 만나 함께 여행을 한다. 집은 장소를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소년은 질문을 하고 두더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한다. 여우는 침묵을 지킬 때가 많은데 상처가 많기 때문이다. 말은 매주 유순하다. 이들은 여행하는 동안 비바람과 폭풍우를 만나지만 서로의 사랑에 의지하여 이겨낸다.


정처 없이 소년은 거친 들판을 다닌다. 소년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이 그림책의 등장인물들은 그저 소년이고 두더지고 여우고 말이다. 소년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부모가 없는 고아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렇게 틀에 박힌 사람이다. 소년은 부모가 없는 그런 아이가 아니라 나 자신이고 우리 모두이다. 두더지도 여우도 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그들이다. 소년이 들판을 정처 없이 다닌다는 것은 우리 삶의 여정이라고 저자는 밝혔다. 소년은 케이크에 집착하는 두더지와 상처가 많아서 경계심이 있는 여우와 친구들의 질투로 인해 날지 못하게 된 말을 차례로 만나 집으로 가는 모험을 시작한다. 이들이 함께 하는 모험 또한 우리가 사는 모습이다. 책의 문장들은 아름다워서 자꾸 눈물이 난다. 이를테면 이런 거.


"안녕"

"난 아주 작아." 두더지가 말했어요.

"그러네." 소년이 말했지요.

"그렇지만 네가 이 세상에 있고 없고는 엄청난 차이야."


소년은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성공은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웃음이 나오는 대목도 많다. 좋아하는 것이 있냐고 묻는 소년에게 두더지가 하는 대답.

"처음 시도해서 잘 안되면 케이크를 먹어."

케이크가 칼로리 때문에 피해야 할 음식이 아니라 실패를 극복하고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거라는 것. 우리가 먹어야 하는 케이크는 다정한 말 한마디와 따뜻한 공감의 표정과 손짓이 아닐까. 그것은 달디 단 케이크보다 더 달달하게 영혼을 살찌우게 하는 거니까. 케이크를 좋아하는 두더지가 하는 말.

"케이크보다 좋은 건 껴안는 거야."


또 눈물이 나서 훌쩍거렸다. 실패했을 때, 세상을 등지고 싶을 만큼 주저앉았을 때, 자기혐오에 시달리며 없는 죄까지 털어내 스스로 괴롭힐 때 그가 나를 안아주었으면 했었다. 그런데 그도 내게 그걸 바랐다... 훌쩍.... 케이크 먹을래? 물어봐야겠다. 안아달라고? 음.... 이... 리 와....


머리를 탁 치는 예리한 통찰의 문장도 있다.

"시간을 낭비하는 가장 쓸데없는 일이 뭐라고 생각하니?"

소년의 질문에 케이크를 두 개나 먹어치운 두더지가 말한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일"


한참 동안 멍하니 상처받은 마음으로 머물렀던 문장들도 있다. 어떨 때는 너무 좋아서 마음을 건드리는 것이 상처가 되기도 하는 그런 것.


"내가 아는 나이 든 많은 두더지들은 그동안 자신의 꿈보다 두려움에 더 많이 귀를 기울였다는 걸 후회해."

"가장 심각한 착각은 삶이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누군들 안 그랬을까. 나의 들판은 거칠었고 평탄하지 않았다. 그 길을 걸어오는 동안 나는 나이 많은 두더지가 되었다. 팔과 다리는 물론이고 얼굴과 마음에 들판에서 긁힌 생채기들과 그 흔적들이 많다. 긁힌 생채기에 주목하느라 앞으로 나가지 못했던 것, 원하는 꿈을 뒤로만 미루면서 정작 그때 그 시간을 온전히 살지 못한 것, 자기 생채기에 갇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놓치고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던 것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나는 두더지의 케이크 사랑에 히죽거리고 웃다가 휴지를 코에 대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 책은 그런 대목들이 많다. 저자는 어떤 사람인데 이런 책을 썼을까.


찰리 매커시는 평소에 친구들과 나눈 대화를 그림과 글로 표현했고 이를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그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그림과 글은 중증장애 치료센터, 청소년 학교, PTSD 치료 센터 등 다양한 곳에서 사용 허가 요청이 들어왔고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 저널이 베스트셀러로 선정했으며 그 덕분에 나도 이 책과 만나게 된 것이다.


저자는 사랑과 우정에 관한 책이라고 했다. 최근에 나는 또 하나의 우정이 깨지는 일을 겪었기에 우정이란 말이 아프게 다가왔다. 커다랗지만 매우 유순한 말이 친구들에게 말했다. 자신은 날 수 있다고. 그런데 다른 말들이 질투하는 바람에 날기를 그만뒀다고. 소년과 친구들은 말했다.

"괜찮아. 우린 널 사랑해. 네가 날 수 있든 없든."

친구들의 말에 말의 등에선 다시 날개가 솟아올랐고 말은 눈부시게 날아올랐다.


우정이란 이런 것이다. 상처를 딛고 성장하게 하는 것, 그를 조건 없이 지지해 주는 것이다. 상처받을까 봐 두려워 미리 상처를 주는 것만 선택하는 친구. 그것이 관계에 대한 불신과 무책임이라는 걸 모르는 그에게 "네가 불신과 상처에 대한 두려움이 있든 없든 괜찮아. 우린 널 사랑해."라고 말해 주는 것, 그것이 우정이고 사랑이다. 하지만 나의 우정이 깨진 건 "네가 어떤 존재든 상관없이 널 사랑해."라는 말이 그에게 가 닿지 않은 탓이다. 우정은 "내 약점을 대담하게 보여" 주는 거라고, 나는 너의 약점으로 너를 대하지 않는다는 걸 제대로 말해주지 않은 탓이다. 그런데 때로는 친절과 인내로 관계에 책임을 지려고 했던 태도에도 불구하고 진심이 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친절한 말이나 배려가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고 생각하기도 하니까. 어쩔 수 없을 때가 있다. 이럴 땐.... 케이크를 먹어야 한다.


"먹구름이 몰려오면...."

"..... 그래도 계속 가는 거야."

"감당할 수 없는 큰 문제가 닥쳐오면...."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랑하는 것에 집중해."


이 책을 읽을 때 휴지를 한 통 앞에 두시길 바란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나는 독서 노트에 메모를 한다. 인상 깊은 문장을 옮겨 적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몽땅 적어야 했으니 그냥 두는 것이 나았다. 책을 읽으며 눈물샘이 고장 난 사람처럼 울었고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순하고 착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다 다시 성이 나고 화가 차 오르면 다시 읽는다. 강아지가 일을 저질러도 자식이 성에 안 차도 도저히 맞지 않는 나의 로또 남편에게도 착해진다. 돈이 없으면 어떠랴. 내 안으로 들어온 두더지는 이렇게 말하게 한다.

"괜찮아, 괜찮아. 그까짓 게 뭐라고. 나는 널 사랑해. 네가 일을 저지르든 내 속을 터지게 하든. 돈? 그거 케이크야? 돈이야 뭐... 그것만 빼면 너 가진 거 무진장 많아."


"난 우리가 왜 여기 있는지를 깨달았어." 소년이 속삭였어요.

"케이크 때문에?" 두더지가 물었습니다.

"사랑하기 위해." 소년이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랑받기 위해." 말이 덧붙였습니다.

"달리 또 해 주고 싶은 말은 없어?" 소년이 물었어요.

"누군가가 널 어떻게 대하는가를 보고 너의 소중함을 평가하진 마." 말이 대답했어요.


저자는 머리말 끝에 이렇게 썼다.

"저는 당신이 이 책을 재미있게 읽고 자신을 더욱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저자의 바람은 내게서 이루어졌다. 나는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과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더 소중히 대하게 됐으니까. 나처럼 당신도 휴지 한 통을 다 쓸 정도로 눈물을 흘리며 이 책을 읽고 자신과 더불어 곁에 있는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기를.


"케이크보다 더 좋은 게 있다는 걸 알았어."

"그럴 리가. 말도 안 돼." 소년이 말했습니다.

"정말 알게 됐다니까." 두더지가 말했어요.

"그게 뭔데?"

"껴안는 것. 그게 더 오래 가."


훌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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