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반스케치 그리고 쓰다
날이 좋았다. 미세 먼지도 없고 비행접시 같은 구름이 둥둥 떠 있는 맑은 날이었다. M 씨의 생일에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속초의 포장마차에 가기로 했다. 속초에 몇 번 다녀오니 친절하게도 속초와 관련된 알고리즘이 자꾸 뜨고 있었던 것이다. 속초 맛집, 카페, 기막힌 선술집, 이곳에 꼭 가세요, 하며 속초가 자꾸 손짓을 하던 터라 M 씨가 원하는 가리비 조개구이집을 가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숙소가 고성에 있어서 근처 수영장을 검색했다. 여행지마다 그 지역 수영장에서 수영하는 것은 우리 여행의 루틴이다. 숙소인 리조트에서 15분 거리에 고성군 국민체육센터가 있었다. 1층이라 볕이 잘 들어왔고 까치발을 하면 바다가 보였다. 사람이 많지 않아 천천히 여유롭게 수영했다. 개운하게 수영으로 시작해서 조개구이로 불태우자며 키득거렸다.
수영장 바로 근처에 초콜릿 카페가 있다며 H 씨가 꼭 가야 한다고 했다. 초콜릿 생산공장을 겸한 곳이었는데 여러 가지 맛의 초콜릿이 있었다. 원료인 카카오가 동해지역에서 생산된다고 했다. 처음 아는 사실이었다. 카카오 원료는 아프리카에서 오는 거 아녀? 무식하기는. 우리 동해에서 키운다잖아. 와~ 그렇군. 훌륭하네. 초콜릿은 달지 않으면서 쌉싸름한 카카오의 맛이 진하게 입맛을 잡아끌었다. 초콜릿 라테를 마셨는데 그 맛이 잊히지 않는다. 견과가 들어간 초콜릿 살라미와 초코빵을 사들고 김치찌개를 먹으러 갔다. 늦은 점심이어서 그랬는지, 수영하고 초콜릿을 먹어서인지 김치찌개도 아주 그만이었다. 가리비 조개구이집은 6시부터 영업시작이래. 그래? 그럼 체크 인을 하고 나오자. 아, 늘 앞일은 알 수가 없는 것. 체크인하러 들어가지 말았어야 했다.
어둑어둑해지는 것을 보고 우리는 목적지가 있는 속초시내로 가려고 밖으로 나왔다. 낮의 맑은 날씨가 거짓말처럼 변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바람이 불면서 눈이 내렸다. 올해 보는 첫눈이었다. 눈은 금방 쌓이기 시작했고 기온이 영하 7도로 급강하하면서 도로가 얼고 있었다. 심상치 않았다. 시내 포장마차에 가서 조개를 구우면서 생일 축하주 한 잔 하려고 왔는데 깨끗이 포기해야 했다. 생일자인 M 씨 얼굴에 서운함이 그늘을 쳤다. 눈이 엄청 내린다며 집에서 문자가 왔다. 할 수 없지. 리조트나 둘러보자. 대게는 너무 비싸군. 2인에 40만 원이라니. 대게 장사나 할까. 객쩍은 소리 하면서 어슬렁어슬렁. 평일이라 리조트엔 사람이 적었다. 포장만 된다는 옛날 통닭 한 마리 사 들고 숙소로 들어와 몽트비어 세 병을 나눠 마시며 생일을 축하했다. 부디 잘 먹고 잘 사시오. 너무 오래 살진 맙시다. 고단하게. 크크크 그럽시다. 숙소의 바닥은 따끈했고 바람이 내는 귀곡성을 들으며 사이좋게 코를 골고 잤다. 아침에 일어나 뉴스를 훑어보니 서울엔 눈 때문에 한바탕 난리를 겪고 있었다.
속초엔 아주 맛있는 커피집이 있다. 이름하여 "세렝게티". 무슨 사바나 초원도 아니고 이름이 왜 저래? 했다. 지붕 낮은 구옥을 대충 고친 커피집이었다. 시그니처 라테를 마시려고 아침부터 줄을 선다기에 마셔보자 했다. 한 모금 마시고 눈이 번쩍 뜨였다. 흔히 아는 우유 베이스가 아니었다. 그보다 진하면서 깔끔하고 진득한, 콩 냄새가 났다. 어떤 라테는 라테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에스프레소가 아쉬운데 이 집의 라테는 그렇지 않았다. 충실하고 깊은 우유에 진한 에스프레소가 아주 훌륭했다. 고명으로 달고나를 부셔서 얹었는데 재미있게 느꼈다. 어찌나 진한지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곁들여 마셔야 할 정도다. 그 집 커피 생각이 났다. 조개구이를 못 먹었으니 세렝게티라도 가자. 오우 케이. 체크 아웃을 했다.
밖으로 나오니 어제의 눈보라가 거짓말 같았다. 청명한 하늘 아래 울산바위가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굿 모닝, 울산 바위. 또 보자. 감자 옹심이 언능 먹고 세렝게티 라테 마시자. 그거라도 마시고 가야 속초에 온 보람이 있지. 그치. 그러나 옹심이 먹고 간 세렝게티는 어두컴컴, 휴업이다. 휴가 간다는, 성의없는 메모가 붙어있었다.
이번 여행은 잘 풀리지 않는구먼, 입맛을 다시며 돌아 나오는데 환한 햇살 속에 민트색 집 한 채가 짠~하고 나타났다. 데크와 낮은 대문에 민트색 칠을 했고 빨랫줄엔 가자미와 오징어가 꼬들꼬들 매달려 있었다. 지붕은 새로 얹었는지 햇살이 튕겨나가고 걸려있는 생선들 뒤로 선명한 그림자가 쪼로록 매달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맘에 드는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영 망친 여행은 아니네. 사진 한 장 건졌으니. 그러게. 예쁜 집이네. 잘 그려 보시오. 한 마디씩 했다. 집에 와 펜으로 그리고 색을 입혔다.
요즘 세일러 만년필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펜을 잡는 느낌이 좋고 부드러우며 적당히 거칠게 표현할 수 있어서 마음에 든다. 직선의 곧은 선은 피해야 한다. 그런 선은 그림을 깔끔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답답하고 유치한 느낌을 준다. 그림의 완성은 그림자다. 그림자를 그리는 것이 오히려 어려울 때가 많다. 숨을 참고 한 번에 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저분해져서 애써 그린 그림을 망치게 된다. 진하게 표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덧칠을 해도 티가 나면 안 된다. 넓적 붓을 꺼내 사용하니 조금 수월했다. 하늘을 더 파랗게 그릴까, 그냥 둘까 하다가 슬쩍 흉내만 냈다. 이 그림은 민트색 집이 주인공이니까.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지만 그림이 맘에 들었다. 친구들에게 보이니 잘 그렸다며 전시회를 하자고 난리다. 역시 친구들은 객관적이라든가, 객관성을 가진다라든가 하는 것들은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저 잘했다고 박수부터 친다. 그 마음이 고맙고 다정하다.
생일자를 위해 갔던 속초행은 이 그림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림을 보니 그때 그 장소와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 주고받은 말들, 들고 있던 커피 향 등이 되살아 난다. 어반 드로잉은 한 장의 usb다. 그림 한 장에 여행의 기억과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