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를 하나 더 얻는다면

필사하며 나누며

by Eli


*이 매거진은 fragancia 작가님의 필사 모임에서 제공된 자료를 토대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 매거진은 fragancia 작가님과 공동으로 하는 글쓰기입니다.




언어는 세상을 보는 렌즈다. 풍성한 언어를 가진 사람은 세상을 다채롭게 본다. 같은 풍경을 봐도 더 많은 빛깔을 발견하고 같은 사람을 만나도 더 깊은 마음을 읽는다. 언어가 깊은 사람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한다. 똑같은 길을 걸어도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고 평범한 일상에서도 깨달음의 단서를 발견한다. 세상이 지루하고 단조롭게만 느껴진다면 그건 세상의 잘못이 아니라 내 언어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언어가 빈약하면 감각이 무뎌지고 감각이 무뎌지면 삶의 반경도 좁아진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품격 있는 태도에 관하여, (김종원)-


질문: 언어를 하나 더 얻는다면 삶에서 가장 먼저 달라질 풍경은 무엇일까요?




"풍성한 언어를 가진 사람은 세상을 다채롭게 본다."


흔히 샤를 마뉴의 말로 전해지는 "언어는 또 다른 영혼이다"라는 문장이 있다.

"To have andther language is to have another soul."

참 아름다운 문장이 아닌가. 언어가 또 하나의 영혼이라면 그것은 우리 존재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일까. 파스칼 메르시어의 <언어의 무게>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두 사람은 에스파냐어 '펠리시다드(felicidad)'가 그 시기의 행복에 어울리는 유일한 단어라고 생각했다. 이탈리아어 '펠리치타(felicita)'는? 너무 현란하고 깊이가 없었다. 사탕 색깔이나 싸구려 젤라토 같은 울림이었다. 프랑스어 '보뇌르(bonheur)'는? 너무 평평하고 들척지근하고 향수를 슬쩍 뿌린 것 같았다. 그럼 영어 '해피니스(happiness)'? 귀엽고 레이랜드 집에 있는 장식품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니까 에스파냐어가 정확하게 어울렸다."(언어의 무게, 파스칼 메르시어)


니는 이 구절을 읽으며 다른 언어에 따라 감각적 느낌을 구분할 수 있는 인물들에게 질투를 느꼈다. 나에겐 없는 능력이다. 내가 구사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말뿐이고 기껏해야 영어 단어를 겨우 떠올릴 수 있는 정도니 말이다. 어떤 단어 하나가 각기 다른 언어로 표현될 때 그 뉘앙스가 달라질 거라는 것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옮겨 적은 걸 다시 들여다보다가 아!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구나. 아, 그렇다면!


즉흥적으로 몇 개의 단어가 떠올랐다. 이 단어들을 찾아보고 각각 에스파냐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의 순서로 나열하며 비교해 보았다.


*"희망" 에스페란사(에스파냐어 esferanza)-스페란차(이탈리아 speranza)-에스푸아르(프랑스어 espoir)-호프(영어 hope)이다. 에스파냐의 z는 '사'라는 발음에 가깝고 이탈리아어 z는 차/짜에 가깝다고 한다. 그래서 같은 z인데 발음이 다르다. 영어를 뺀 나머지 말들은 es-나 s-가 붙어있다. 음... 특히 와닿는 말은 에스페란사다. 예쁜 아가씨가 생각난다. 예쁜 아가씨의 환한 미소 같은 것이 희망일까? 막연하고 추상적인 희망, 언제나 저 강 건너 손길 닿지 않는 곳에 있는 희망이 길 가다 마주칠 것만 같다. 예쁜 미소를 가진 아가씨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스페란차는 돈키호테의 라만차가 연상되고 에스푸아르는 거위 간 요리가 생각난다. 영어의 호프는 호우-와 -프라고 발음하는 사이에 입을 닫으며 -프 발음이 작아지는데 단어를 안으로 집어넣는 기분이다. 희망은 속으로 품는 기원이라서 그럴까.


*"영혼"은 알마(alma)-아니마(anima)-암(ame)-소울(soul)이다. 이 중 프랑스말 '암'은 아주 짧고 깊게 발음한다고 했다. (프랑스어 'a' 위에는 '<'를 오른쪽으로 45도 틀어서 올려놓은 기호가 있다.) 영혼이라는 말을 소리 낼 때 프랑스 사람들은 아주 짧지만 깊게 발음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라틴어 anima(아니마)는 '숨, 호흡, 생명'이라는 뜻에서 출발했고 이탈리아어 '아니마'와 프랑스어 '암'에는 '살아있다는 기척' 같은 느낌이 남아있다고 검색은 알려주었다. soul을 제외한 말들은 고대 인도어 느낌이 난다. 개인적으론 영어의 soul이 내 soul을 건드린다. 살아있는 기척.... 내 영혼이 살아있음을, 그 기척을 너는 알아채고 있는 거니?


*"언어"는 렝과(에스파냐 lengua/idioma)-링구아(이탈리아 lingua)-랑그(프랑스 langue)-랭귀지(영어 language)이다. 렝과(에스파냐어)/링구아(이탈리아어)/랑그(프랑스어)는 모두 라틴어 '링구아(lingua 혀)'에서 파생되었다. 대학에서 공부하던 '랑그와 파롤'이 떠올랐다. 흔히 알려졌듯이 '랑그'는 사회적 규칙으로 언어의 약속을 가리키고 '파롤'은 개인이 구체적으로 발화하는 랑그의 실천이다. 소쉬르니 촘스키니 어려웠고 간신히 C학점으로 이수했던 공부였는데, 언어를 몸의 일부라고 인식했다니 놀랍다. 언어는 의사소통을 위한 전달 수단일 뿐만 아니라 언어 사용자의 몸과 연결되는 존재의 일부라는 것이다. 언어는 사회적 약속의 음성적 기호이면서 개인 존재성의 발화인 것이다. 그러니 함부로 내뱉지 말아야 한다. 함부로 내뱉은 말에 내 존재의 가치도 들어있다.


*"연민"은 콤파시온(에스파냐 compacion)-콤파시오네(이탈리아 compacione)-콩파시옹(프랑스 compassion)-컴패션(영어 compassion)이다. 이 말의 어원은 라틴어 com(함께) + passio(고통)이 합쳐진 말이다. 연민은 불쌍하다는 동정에서 나아가 마음을 움직여 함께 아파하는 상태라는 것.


성경에 나오는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생각난다. 사제와 율법학자는 강도를 당한 사람을 지나치며 그것 참 불쌍하군, 하며 서서 내려다보면서 이런저런 핑계를 늘어놓고 지나쳐 가지만 멸시받는 사마리아인은 지나치지 않고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 돕는다. "연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몸을 움직이는 구체적인 행동의 의미가 들어있다고 했다. 비슷한 말로 영어의 pity가 있다. 이것은 우리말 '자비'에 대응하는 말인데 연민과는 결이 다르다. 자비엔 관대함과 사랑, 받아들임의 의미가 느껴지는데 연민이란 말에는 적극적인 공감과 헌신, 봉사, 그리고 자비가 들어있는 것 같다. 연민이 갖는 깊은 감정이 순간 나를 뭉클하게 했다. 누구나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사마리아인이 되진 않는다. 측은한 마음만 품고 몸을 움직이는 실천이 없기 때문이다.


영어가 청바지에 맨투맨을 입은 모습이라면 에스파냐어나 이탈리아어는 양복을 차려입은 느낌이고 프랑스어는 그 양복에 레이스가 달린 것만 같다. 여러분의 존재엔 어떤 단어가 가 닿았을지 궁금하다.


<언어의 무게>에 나오는 것처럼 몇 가지 언어를 알아보는 일은 아주 재미있었다. 같은 의미지만 발음과 표기가 다르다 보니 각각의 언어가 주는 뉘앙스 또한 달랐다. 몇 가지 어의 비교만으로도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사는 게 지루해 자기만의 언어로 말을 바꿔버린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회색 노트> 속 '그 남자'. 그를 떠올리며 나만의 언어 노트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단어들을 더 찾아보고 노트에 모아 비교해 보는 것이다. '그 남자'는 언어의 사회성을 간과해 끝내 고립되어 버렸지만 내 모국어를 다른 언어와 비교해 보는 나의 노트는 언어를 잃어버릴 위험보다 다채로운 언어의 세계를 맛보게 줄 거라는 즐거운 생각이 든다.


"세상이 지루하고 단조롭게만 느껴진다면 그건 세상의 잘못이 아니라 내 언어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큰아이에게 군대란 곳은 견디기 힘든 곳이었다. 내향적이고 사고가 깊은 아들은 단체생활을 그 무엇보다 힘들어했다. 혼자 있고 싶어 했다. 그럴 때마다 그 애가 택한 곳은 화장실이었다. 그곳은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이었다. 거기에 쭈그리고 앉아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의 긴 이야기를 읽고 스페인어를 공부했다. 훈련이 잦은 부대였지만 부대에 복귀할 때마다 평소에 쓰지 않던 스페인어로 날짜와 요일을 적으며 일기를 썼다. 다른 언어의 사용은 군대라는 획일된 환경과 집단주의 상황을 견디게 했고 무엇보다 재미있었다고 했다. 어떤 재미를 추구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여러분도 한 번 해 보시라. 여러분이 좋아하는 단어를 찾아보고 그 발음과 말에 깃든 깊은 뜻을 찾아보시라. 이 일은 아주 재미있다는 것을 장담한다. 게다가 의도하지 않은 사유를 경험하는 보너스가 따라온다. 꼭 다른 나라의 언어를 비교해 볼 필요는 없다. 당연하게 사용하는 내 나라 말, 그중에서 특히 자주 사용하는 말, 이상하게 끌리는 단어 등이 있다. 그것들의 숨겨진 의미를 찾아보면 예상하지 못한 깊고 풍부한 의미가 있다는 것과 내가 사용하는 말이 일정 범위에만 국한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심코 사용하던 말들에 깊고 풍성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언어의 세계는 확장된다. 이후의 나의 언어는 달라질 것이다. 말을 해야 할 때, 글을 쓸 때 전과 다르게 깊어지고 진중해지며 그 의미 앞에서 삼가게 될 것이다. 언어는 그 사용자의 내면이니까.


아주 좋아하는 책의 한 부분을 소개하며 글을 맺어야겠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의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바뇨는 '인간들의 야만성을 잊게 해주는 세상의 아름다운 언어'가 연애소설이라고 보았다. 그 노인처럼 떨리는 마음으로 말을 하고 책을 읽었던 것이 언제였는지, 그런 적은 있었는지 자문해 본다. 자신의 언어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그 언어는 앵무새의 음성과 다르지 않다.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 그 재미와 깊이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자 특혜다. 참 감사한 일이다.


"노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책을 읽었다. 그의 독서 방식은 간단치 않았다. 먼저 그는 한 음절 한 음절을 음식 맛보듯 음미한 뒤에 그것들을 모아서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읽었다..... 그것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이렇듯 그는 반복과 반복을 통해서 그 글에 형상화된 생각과 감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도대체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깨달을 때까지, 마침내 그 구절의 필요성이 스스로 존중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 중에서, 루이스 세풀 베다, 정창 옮김,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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