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 그 남자의 사탕바구니

한 번도 돌려주지 못한 고백에 대하여

by fragancia

* 이 매거진은 Eli 작가님과 공동으로 하는 글쓰기입니다.


이것이 사랑인가. 서로가 서로에게 한쪽 어깨를 빌려주고 기대는 것, 이것이 사랑일까...
나영규와 만나면 현실이 있고, 김장우와 같이 있으면 몽상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몽상 속에는 현실을 버리고 달아나고 싶은 아련한 유혹이 담겨있다. 끝까지 달려가고 싶은 무엇, 부딪쳐 깨지더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무엇, 그렇게 죽어버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장렬한 무엇. 그 무엇으로 나를 데려가려고 하는 힘이 사랑이라면,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에서 나는 처음으로 사랑의 손을 잡았다.

- 모순. (양귀자)


Q. 유난히 오래 기억에 남아 있는 사랑의 흔적이 있나요?




매년 어김없이 돌아오는 화이트데이. 이미 편의점 앞은 형형색색의 사탕들이 예쁜 상자와 꽃다발 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떤 이의 손에 들려 행복을 건넬지, 집으로 걸어오며 그날을 떠올렸다.


고1 겨울방학. 그 시절 컴퓨터 관련 자격증이 필요해 두 달간 학원을 다녔다. 학원은 집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학원비가 저렴하다는 이유 하나로, 매일같이 왕복 한 시간 사십 분 가까이 버스에 몸을 실었다. 여고생이 남학생들 틈에서 수업을 듣는 일은 영 어색했다. 수업이 끝나면 인사도 없이 버스에 올라타기 바빴다. 다행히 필기와 실기를 한 번에 합격해 짧았던 학원 생활은 그렇게 끝이 났다.


아무 생각 없이 고2 생활을 하던 어느 날, 3월 14일. 시끌벅적한 점심시간, 복도에서 “꺄악”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가 또 남자친구에게 사탕 받았나 보네.’

점심을 먹고 자리에 앉아 고상하게 십자수를 놓고 있던 나. 그때였다.

드르륵— 커다란 사탕 바구니를 든 남자가 교실 앞문으로 들어오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야!! **가 누구야?”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나는 슬로모션처럼 고개를 들어 그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전데요…?”

“너 S고 ** 알지?”

“아니요, 모르는데요.”

너무 당황한 탓에 그는 반말을, 나는 존댓말을 썼다. 안경 너머로 바라보는 눈빛에, 나는 목 끝까지 열이 차올랐다. 그는 입꼬리를 올린 채, 십자수 천이 놓인 내 책상 위에 커다란 사탕 바구니를 턱 하고 내려놓더니 유유히 사라졌다. 순식간에 교실은 술렁거렸다.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 물었다.


“웬일이야, 웬일이야. 너 남자친구 있었어?”

교실은 금세 술렁였다. 소문은 복도를 타고, 계단을 내려가, 다른 반까지 번져 나갔다. 여고 교실에 남자가 들어와 사탕을 두고 갔다는 사건은 그날의 가장 자극적인 뉴스였다.

멍하니 바구니만 내려다보았다. 하이틴 소설 속 장면이 현실이 되기엔, 지금 돌이켜봐도 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S고 **’라는 이름을 되뇔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 분명 처음 듣는 이름인데, 너는 누구란 말이냐.

그때 짝이 사탕 사이에서 쪽지를 찾아냈다.


— 토요일 오후 4시, 학교 앞 놀이터에서 기다릴게. **가 —


바구니 안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사탕 하나하나가 파스텔톤의 투명 비닐로 정성스레 포장돼 있었다. 평소 보던 사탕도 아니었고, 손재주가 보통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얼추 보아도 몇백 개는 되어 보였다. 혼자 먹을 수 없어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남은 사탕은 가방에 구겨 넣었다. 이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집에 갈 용기는 도저히 나지 않았다.


토요일이 올 때까지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기억조차 흐릿하다. 기대와 불안, 당혹과 설렘이 뒤섞여 잠도 쉽게 오지 않았다. 친구들은 무조건 나가야 한다며 내 일보다 더 초조해했다. 하긴, 사탕을 전해준 남자가 20대 초반의 오빠였으니, S고 남학생의 정체는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대망의 토요일. 혼자 나가기 부끄러워 친구와 함께 놀이터에 갔다. 구석에 검은 옷을 입고 서 있던 남학생이 멀리서 눈에 들어왔다. 이제부터는 혼자 가야 할 순간.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왔어? 안 올 줄 알았어”

하얀 얼굴에 뿔테 안경, 전형적인 모범생 스타일. 그런데도 그는 너무 낯설었다.


“혹시… 사탕 보낸 거 너야? 미안한데, 나는 널 오늘 처음 보는 것 같아서.”

“겨울에 컴퓨터 학원에서 같이 수업받았었어. 넌 앞에 앉아 있다가 수업 끝나면 바로 가서 몰랐겠지만, 나는 뒷자리에서 널 봤어.”

그는 내 사소한 버릇들, 펜을 돌리던 손짓, 낙서, 노란 가방에 달린 스누피 인형, 항상 마시던 바나나 우유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나, 너 좋아해. 나랑 사귈래?”

태어나 처음 받아본 남학생의 고백이 공기 속에 내려앉는 동안 놀이터의 그네는 바람에 밀려 혼자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내 대답을 대신 고민하는 것처럼.


“미안한데… 지금 몸이 안 좋아서. 사탕은 정말 고마워. 근데 지금 내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어.”

메일 주소를 적어주며 이야기를 이어가도 되겠냐고 묻는 그의 얼굴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노트에 메일을 적는 동안, 토마토처럼 붉어진 내 얼굴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아직도 선명하다.


며칠 동안 도착한 메일을 차마 열지 못했다. 죄스러움이 쌓여 손끝이 떨렸다. 한참 후에야 용기를 내 읽은 메일 속에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진심이 담겨 있었다.

화이트데이 이벤트를 위해 친구 셋과 저녁까지 사탕을 포장했다는 이야기, 퀵으로 보내기 위해 아는 형에게 부탁했다는 말, 놀이터에서 많이 떨렸다며 거절당해도 후회는 없다는 고백까지. 마지막 메일에는 곧 서울로 이사 간다는 소식도 적혀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오래 울었다.

그리고 A4 두 장 분량의 답장을 썼다. 지금의 나, 남자친구를 사귀지 않겠다는 이유, 그리고 무엇보다 날 좋아해 준 그 마음이 너무 고맙다는 진심도 적었다. 아마 평생 3월 14일이 되면 이 사탕 바구니를 잊지 못할 거라는 말까지. 그 메일이 내가 그에게 보낸 처음이자 마지막 답장이었다.


그 후에도 몇 차례 메일이 왔다. 그는 잊지 않고 졸업 후 H대에 진학했다는 소식과 함께 연락처도 남겨두었다. 하지만 나는 끝내 연락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서로 다른 시간 위에 서 있었으니까.




유난히 오래 기억에 남아 있는 사랑의 흔적은, 이루어지지 못한 마음이다. 함께하지 못했기에 더 또렷해진 얼굴, 닿지 못했기에 더 오래 남은 온기. 누군가의 열여섯이 내게 건너왔던 그 봄은, 계절이 몇 번을 바뀌어도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봄이 오면, 그 아이의 안부를 먼저 떠올린다. 어디선가 잘 살아가고 있기를, 그날의 용기가 그의 삶을 부드럽게 밝혀주었기를.

그렇게, 나의 봄은 사라지지 않는 한 장면이 되어, 사탕을 타고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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