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살린 Jan 14. 2019

법고전[변명]04. 거리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2

소크라테스의 변명

6. 

소크라테스에게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일치하는 것이다. 선을 아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知)는 덕(德)과 일치한다. 지가 덕이면, 무지는 악덕이다. 잘못된 행동은 항상 무지의 산물인 것이다. 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항상 그 행위가 어느 정도 선하다고 생각하면서 행동한다. 악행은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에서 이루어진 무지의 산물이다. 예로 도둑질이 나쁜 것은 알지만, 그 도둑질이 그에게 행복을 줄 것이라는 희망에서 도둑질을 한다는 것이다.          



7. 

소크라테스는 인간 본성의 궁극적 구조가 영원하다고 믿었고 덕스러운 행동 또한 영원하다고 믿었다. 이런 주장은 소피스트의 회의주의와 상대주의에 대한 반동이다. 인간 영혼에 대한 배려를 인간의 최대 관심사로 생각했던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삶을 면밀히 관찰하고 다른 아테네 인들의 삶과 사유를 숙고하면서 거리에서 논쟁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이것은 아테네가 평화로울 때만 가능했다. 위기에 처한 아테네는 더 이상 소크라테스의 논쟁을 봐줄 포용력이 없었다.           



8.

소크라테스는 가난하고 검소한 철학자의 상징이다. 그러나 실은 그리 가난하지 않았다.  당시 아테네 시민들은 자비로 전쟁에 참여해야 했기에 전쟁 장비를 갖추는 것에서부터 부의 차이가 났다. 아테네는 평소 시민들이 군사 훈련을 해 두고 전쟁이 일어나면 참가하는 시민군 제도로 운영되었다. 아테네 군은 부에 따라 기병, 중무장 보병, 경보병, 재산이 전혀 없는 계급, 이렇게 4개로 나뉘었다. 기병은 말을 타고 참가하고, 중무장 보병은 갑옷과 무기를 들고 참가하고, 경보병은 활이나 창만 들고 참가했다. 그리고 재산이 전혀 없는 계층은 전쟁 참여 기회도 별로 없었고, 아테네 내부에서 전쟁이 일어날 때만 참가할 기회를 얻었다. 소크라테스는 중무장 보병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그런 것으로 보아 우리가 걱정할 만큼 그리 가난하지는 않은 듯하다.           



9. 

기원전 424년 소크라테스는 중무갑 보병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그는 전쟁에 참여한 지 6년 만에 델리온 전투에 보병 7000명과 함께 참여했으며, 민간인 2만 명도 함께 따라나섰다. 그들의 목표는 보이오티아인을 과두제에서 해방시키고 델리온을 민주주의 전초기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목표는 그럴싸했지만, 그것은 그저 전쟁 게임이었을 뿐이다. 아테네의 민주주의 실현 계획은 실패했으며, 보병 1000명과 비무장 민간인 1000명이 죽었다. 소크라테스는 그 살육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보병 중 하나였고 패잔병들과 함께 아테네로 돌아왔다.           



10.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한 아테네는 이 전쟁과 관련된 일련의 사태들로 인해서 소크라테스를 법정에 세운다. 재판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재판에 큰 영향을 미친 일련의 사태 중의 하나는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알려진 희대의 미남 알키비아데스였다. 그가 스파르타로 넘어가 아테네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넘겨준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알키비아데스의 행위에 소크라테스가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또 한 가지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속해 있던 5백 인의 원로원 위원회와 심각하게 반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스파르타에 패한 아테네에 친스파르타 정부인 30인 위원회가 소집되었을 때, 이 구성원 가운데, 몇 명이 소크라테스의 친한 친구였다는 것이다. 이 위원회는 폭력적인 과두 지배체제였으며, 민주정 체제의 핵심인물들을 숙청했다. 결국 1년도 되지 않아 과두 체계는 무너졌지만, 소크라테스를 향한 의심의 눈길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소크라테스에 대한 불신을 더해 결국 기원전 399년에 재판에 회부되게 이른다.           



11.

소크라테스가 기소된 내용은 첫째 국가가 숭배하는 신들을 숭배하지 않는 대신 새롭고도 기이한 종교의식을 소개한 죄, 둘째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죄였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기소되었을 때 바로 망명할 수 있었으나, 법정에 서서 자신을 변호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 그에게 모욕당한 배심원들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형 선고 이후 크리톤을 비롯한 그의 친구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도우려 했으나 도망가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평생 지켜온 신념과 어긋난 것이기 때문이었다.             


  

                         브로멘델, <소크라테스에게 물을 붓는 크산티페>, 1665

매거진의 이전글 법고전[변명]03. 거리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