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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살린 Jan 17. 2019

법고전[변명]05.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그 후의 아테네

소크라테스의 변명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그 이후의 아테네

             


1.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서  27년간 벌어진 전쟁이다. 기원전 490년에서 479년까지 두 차례에 걸친 페르시아 전쟁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아테네는 희랍의 맹주로 부상하고 스파르타는 자국의 치안 문제로 지휘 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단독으로 델로스 동맹을 떠안은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침공에 대비해서 동맹국들로부터 걷어 들인 기금을 기반으로 하여 희랍에서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른바 아테네 제국의 탄생이다.                    



2.

아테네의 급속한 부상은 스타르타를 중심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에게 위협으로 느껴졌다. 결국 기원전 431년부터 404년까지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참혹한 동족상잔의 전쟁을 벌였다. 여기에는 동맹국들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아테네의 횡포가 동맹국들의 피로도를 높였다는 것도 한몫을 차지했다. 결과는 아테네의 참패였다.          



3.

고대사회에서 패전 국가의 성인 남성은 몰살을 당하고 어린아이와 여인들은 노예로 팔려가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이는 아테네가 멜로스에 저지른 일이기도 했다. 스파르타가 아테네에 승리했던 밤, 아테네에서는 밤새 여인들과 아이들의 울음이 도시 전역에 울렸다고 한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가혹한 조처 대신에 아테네에 민주 정치를 폐지하고 스파르타식 과두 정체를 세웠다. 명분은 더 이상 아테네는 강국이 아니라는 것과 페르시아 전쟁에서 아테네의 역할을 기억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아테네를 누름으로써 다른 도시 국가가 부상하여 스파르타에 또 다른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한 조처였다. 



4.

아테네인이면서도 스파르타의 문물을 흠모하던 엘리트 아테네 인들을 중심으로 성립된 30인 과두 정체는 이렇게 해서 세워졌다. 그러나 이 과두 정체는 기존의 반대 세력을 숙청한다는 명분으로 가혹한 테러를 자행했다. 약 9개월간 약 1500명의 아테네 시민들을 처형했고 수 천 명의 시민들이 아테네에서 도망쳤다. 결국 내전을 거쳐 기원전 403년에 다시 민주정이 회복되었다. 회복된 민주정은 대사면령을 내려 30인 과두 정체 시기에 있었던 죄과를 묻지 않기로 했다. 고대 세계 최초의 사면 조처였다. 아테네는 내전을 통해 분열된 시민들 사이의 극단적인 적대감과 실추된 국제적 위상을 403년의 사면령으로 겉으로만 겨우 봉합한 채 제국의 몰락을 견뎌 내고 있었다.           



5.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아테네의 붕괴 조짐은 그 이전부터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특히 멜로스인들에 대한 가혹한 조처는 아테네의 오만과 경직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당시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지원은 하나 전쟁에 참가하지는 않은 멜로스 섬을 포위하고 항복할 것을 최후통첩한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자, 아테네는 멜로스를 초토화시켜버린다. 성인 남자들은 모두 학살하고 아이와 여자들은 모두 노예로 팔아 버렸던 것이다. 아테네가 황금시대에 보였던 관용과 부드러움은 사라지고 몰락을 앞둔 국가의 신경질적인 초조함만이 보이고 있었다. 이런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   


                 

전쟁 첫해, 추도자를 위한 연설을 하고 있는 페리클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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