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의 『벌레이야기』는 여전히 해갈되지 않는 갈증처럼 용서를 던져놓는다. 인문학의 역할중 하나는 타자의 자리로 이동해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감히 알암이 엄마의 자리로 이동할 엄두는 나지 않는다. 영화 ‘밀양’ 속 전도연이 소리조차 없는 피울음을 토해내던 그 자리로 어떻게 감히 갈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용서는 어느 때 가능할까?
1.
니체는 형벌의 기원을 채무관계로 설명하려 하였다. 이는 형벌의 기원이 죄와 형벌이 등치가 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이루어진다. 즉 채권자는 채무자에게 잔인한 형벌을 내림으로써 자신의 물질적 피해는 보상받을 수는 없지만 대가에 맞는 형벌을 줌으로써 자신의 피해를 보상받을 수 있다고 했다. 이를 적용하면 알암이 엄마는 김도섭에게 잔인한 형벌을 줌으로써 그 피해를 어느 정도 보상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식이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었을 때 그에 상응하는 형벌은 어떤 것일까? 사형인가? 아니면 잔인한 고문인가? 자식의 죽음과 잔인한 형벌이 등치가 가능하단 말인가? 가능하다면 김도섭은 그에 걸맞는 형벌을 받고 있는가? 혹은 적어도 그는 양심의 가책에 괴로워하고 있는가?
적어도 김도섭은 자신의 죄에 상응하는 형벌을 받고 있지 않다.
2.
용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서로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아니 가해자가 열 걸음쯤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관계 속에서만이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용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알암이 엄마는 김집사의 설득에 의해서건 섭리를 받아들여서건, 어쨌든 용서의 작은 용의를 냈다. 그러나 정작 가해자인 김도섭은 거대한 섭리 뒤에 숨어버렸다. 피해자는 한 걸음 내딛었지만 가해자는 뒤로 물러나 버렸다 끝까지 비겁하게.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용서의 과정도 불가능하다. 인간사에서 용서와 화해과정에서 일어나는 의례가 일어날 가능성을 김도섭은 저버렸다.
3.
제 3자의 개입이다. 거대한 섭리라는 이름으로, 혹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혹은 삶이 일종의 망상이라는 표현으로 개인의 아픔을 섣불리 일반화시킨다. 인간은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원인과 결과를 알지 못한다. 또한 죽음은 특별한 일도 아니며 드믄 현상도 아니다. 일반화해서 말한다면 알암이의 죽음도 그 섭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섭리라는 고도의 일반화된 삶의 양식의 표현이 어떻게 개인을 위로할 수 있을까? 한 개인을 위로하지 못하는 추상이 어떻게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까? 섭리라는 추상이 어떻게 개인의 구체적인 아픔을 위로할 수 있을까? 표현을 달리하면 개 라는 관념이 개 짖는 소리를 낼 수 있을까? 김집사의 끊임없는 용서의 강요는 이 지점에서 그 정당성을 물어야 한다. 김집사, 너라면 가능하겠냐? 거대한 섭리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개인의 실존적이고 구체적인 아픔이 일반화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일종의 리츄얼이 필요하다. 그것이 울부짖음이건 어떤 형태이건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겪어내야 하는 그런 의식이 필요하다. 그런 의식의 부재에서 개인의 아픔을 일반화하는 것은 대단한 폭력이다. 김도섭, 너의 잔인한 구체적인 행위를 거대한 섭리라는 추상으로 정당화하지마라.
알암이 엄마..
알암이 엄마는 그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자식의 죽음과 등치되는 형벌을 가해자에게 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관계 속에서 한 줄기 실마리를 찾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하여 더 큰 섭리를 받아들 일 수 있는 리츄얼을 겪은 것도 아니다. 감히 알암이 엄마 앞에서 용서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없는 이유이다. 알암이 엄마의 자리로 이동할 수는 없지만, 같이 피울음을 울 수는 있다. 이것이 그녀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공감하는 나만의 리츄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