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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살린 Sep 15. 2021

   어떻게 욕됨을 견딜까?

『독립전쟁론의 선구자 광복회총사령 박상진』을 읽고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윤동주의 참회록 중-


윤동주는 무엇이 그다지도 욕되었을까? 아마도 조선 말기를 관통하면서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이 느꼈을 감정은 욕됨이 아니었을까 한다. 훨씬 이후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그 당시를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도 바로 욕됨이다. 욕됨의 근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외부의 침략세력인 일본에게서 오는 것일까? 안을 지키지 못한 조선에서 오는 것일까? 아니면 그런 세월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무력감에서 오는 것일까? 윤동주 시인 보다 훨씬 많은 세월을 살아낸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만일 그때 내가 살았다면 나는 어떻게 욕됨을 견디어 냈을까?


박상진 의사의 일대기는 그런 욕됨을 헤쳐나가는 하나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감히 따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지난하고 고된 길이다.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말라’던 당시의 윤치호의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나, 일단 물어볼 기회조차 노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한 욕됨이 될 것이다. 박상진은 물 기회를 노린다. 1915년 7월 비밀결사 혁명단체인 광복회를 조직한 것이다. 총사령은 박상진이 맡았다. 광복회의 조직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구체적 실행 방안으로 독립군을 양성하기 의해 만주에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군대 양성을 추진했다. 정말로 단단히 물을 준비는 한 것이다. 광복회 조직 이후 박상진은 대구를 거점으로 하여 영주의 대동상점을 비롯하여 상업조직으로 위장한 연락 기관을 설치하였다. 대동상점은 만주와 연계한 무장 계획과 관련이 있었는데, 이는 광복회가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추진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비록 대동상점이 발각되어 조직이 와해되었으나, 그래도 욕됨을 어느 정도 견뎌낼 수 있는 자긍심은 있었으리라. 이후 박상진은 조선 총독 처단 계획을 세우기도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한다. 조직이 확대되고 강화되는 만큼 추적의 손길도 가빠지고 빨라졌다. 1918년에 대대적인 수색작업 끝에 많은 광복회원들이 체포되고 박상진 의사는 어머니의 위중 소식을 듣고 고향에 내려오다 체포되고 만다. 결국 1921년 8월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조국이 사라진 욕됨을 박상진은 처절한 전략과 투쟁으로 버텨냈다. 그의 행적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욕됨을 자긍심으로 바꿔준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이 평화와 자긍심은 박상진 의사를 비롯한 항일 투쟁 의사들, 그리고 묵묵히 버텨준 선조들 덕이다. 박상진 의사는 언제부터인가 내 주위에서 불쑥 불쑥 나타나는 이름이었다. 아마도 울산에서 생가를 복원하고 그의 행적을 기록하고 기념하는 일을 하고 있어서다. 앞선 이들을 기록하고 기념하고 숙고하는 일, 뒤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감을 위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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