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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재희 Oct 28. 2018

한국 남자보다 강한 미국 여자

'체력은 국력'이라더니...

유학시절 자전거를 많이 타고 다녔다. 주로 등 하교 용이었지만 보스턴 캠브리지 인근은 찰스 강변을 따라 자전거 타러 나가기 좋은 곳이다. 가끔 강변을 달리곤 했는데 내 속도가 느린지 항상 다른 바이커들이 앞서가고 했다. 여기서 인상적이었던 점은 나를 추월하는 사람들이 운동복을 입은 건장한 근육질 남자들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청바지에 배낭을 멘 아주 평범한 여자 대학생들도 모두 나를 추월해 씽씽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나를 아주 여유롭게 지나쳐 갔는데, 따라가려면 나는 곧 숨이 차올랐다. 체력과 근력 모두 밀리는 느낌이었다. 이들과 마음먹고 시합을 할 경우 내가 과연 이길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하체가 부실함을 탓할 수도 있겠으나 한국에서는 좀처럼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없다. 내가 운동을 거의 안 하긴 하지만 체격도 평균 이상이고 딱히 허약한 스타일도 아니다. 예컨대 와이프와 함께 자전거를 타면 내가 아무리 여유롭게 가더라도 추월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와이프 역시 초등학교 때 반에서 계주 선수였다고 하니 기본적으로 체력에 큰 문제가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면 미국 여자들, 나아가 미국인들은 왜 한국인보다 체력과 근력이 좋은 것일까.


기본적으로 신체적인 차이가 있기는 할 것이다. 예컨대 한국 여자들은 출산 이후 무리를 하거나 몸을 차게 해서는 안 되고 3주 동안은 밖에 나오지도 말고 산후조리를 받으며 잘 쉬어야 나중에 큰 고생 없는 회복이 가능하지만 미국 병원에서는 출산 이후 바로 찬물 샤워를 권장하고 (와이프가 왜냐고 물었더니, “개운하잖아"라고 했다고 한다) 산모들이 콜라도 마시며 금방 퇴원해서 유모차도 밀고 자유롭게 다니는 게 일반적이니 타고난 몸이 다르긴 다르다. 하지만 엘리트 체육인들을 보면 한국인들도 근력이나 체력에서 다른 인종들에 비해 대등하거나 적어도 차이가 극복하기 힘들 정도로 크진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더 큰 이유는 우리가 성장기에 운동을 안 했고, 그로 인해 운동이 생활화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학교에서 주로 앉아만 있었다. 체육 시간은 많아야 한두 번이었는데 이마저도 입시 준비를 위한 자율학습으로 대체되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에 반해 미국은 놀랄 만큼 체육을 강조하는 것 같다. 입시를 코 앞에 둔 고2 정도가 되기 전까지는 아이들이 최소 2개 이상의 스포츠를 지속적으로 하고, 부모들은 그런 아이들을 여기저기로 실어 나르는 것이 일상이다. 한국에서는 수능과 내신만 좋으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지만 여기서는 운동도 잘 해야 명문 대학에 갈 수 있고, 만약 운동을 꽤 잘 했다면 진학에 아주 유리하다. 교육 시스템의 구조상 자라나는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강한 체력을 기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생활체육이 진정 생활화되어 있다.  동네마다 대형마트만큼이나 큰 운동용품 판매점이 하나씩 있다. 그리고 다양한 국적의 회사 동료들과 출장을 다녀 보면 매일 아침마다 Gym에 나와서 운동하는 사람들은 다 미국인들이다. 동네를 다녀 보면 조깅용 유모차에 아이를 싣고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애 키우는 것도 피곤할 텐데 저렇게까지 조깅이 하고 싶을까 하지만 (+ 저렇게 어린애를 태우고 뛰는 것이 애한테 좋을까 싶기도) 그들은 이미 운동이 삶의 일부라서 도저히 멈출 수가 없는 것 같다.


여기에 여자들의 경우 ‘여성스러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차이 역시 체력과 근력의 차이로 이어지는 것 같다. 이곳 놀이터에서 미국 여자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면 남자와 다를 것이 없다. 게다가 축구는 미국에서 여자아이들의 운동으로 여겨질 정도로 여자들이 비교적 격한 운동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이곳 분위기다. 한국에서는 여자 아이들은 좀 더 얌전한 놀이를 주로 하고, 성장한 이후에도 ‘여자는 너무 세지 않고, 몸은 날씬해야 하며, 몸무게는 가벼운 것이 좋다'는 사회적 인식이 두텁게 깔려 있지 않나. 이런 인식이 한국 여성의 전반적인 체력 저하를 부르는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런 체력적 차이가 실제적인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나야 공부를 치열하게 많이 한 사람은 아니지만 박사과정에 있는 한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어느 수준 이상에서는 미국 친구들과 경쟁하기 힘들어지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체력적인 차이라고 한다. 회사원인 나 자신만 돌아봐도 마찬가지다. 어린아이 둘을 키우다 보니 퇴근 후, 그리고 주말이 끝나면 허리도 아프고 몸이 두드려 맞은 듯 힘들다. 조금 놀아 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진이 빠져서 회사 일은 신경도 못 쓰고 자기 발전은 요원하며 아이에게 방바닥을 뒹구는 모습을 주로 보여주게 된다. 와이프는 더 하다. 일단 ‘기본적으로 날씬해야 하는' 한국 사람이다 보니 몸무게도 적게 나가는데 점점 무거워지고 몸을 뒤틀어대는 아이들을 몇 번 안다 보면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프고, 몸이 아프니 기분도 우울해진다. 유모차를 오래 밀고 다니는 것도 힘든데, 옆에서 미국 여자들이 거뜬히 한 손에 애 하나 들고 다른 손으로 유모차를 접었다 폈다 하면서 다니는 것을 보면 부럽다고 한다. 무엇보다 우리 둘 다 피곤하니 아이들을 대하면서 짜증도 많이 내고 자주 다투게 되는 등 체력 저하에서 오는 부작용이 만만찮다. 내가 어릴 때 한국에서는 ‘체력은 국력'이란 말을 많이 들었는데, 이거 말만 그렇게 했지 실제로는 하나도 생활에 반영되지 않은 것 같다.


게다가 운동을 잘 하면 아무래도 삶이 풍요로워지고 건전해지지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잘 하는 걸 즐기게 되어 있는데, 내가 성장기에 10년 이상 테니스와 수영을 했다면 성인이 되고 나서도 여가 시간에 운동을 하면서 충분히 스트레스도 풀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에서는 조기축구회 분들 이외에는 지속적으로 강도 있는 운동을 하는 예를 찾기가 힘든데 (그나마 군대에서 2년간 지겹도록 축구를 시켜주는 걸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여가를 항상 쇼핑/술/영상물과 함께 보내는 것보다는 운동을 하는 것이 아무래도 좀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운동을 하더라도 몸을 만들어 내보이기 위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하는 운동이 아닌 내가 잘 하는 운동을 즐거움을 위해 하는 것이라면 더 좋을 것 같다. 개인들은 신체적/정신적으로 건강해지고, 증진된 체력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며, 국가는 의료보험 부담이 줄어들 테니 좋지 않겠는가. 게다가 신체활동이 증진될 때 창의성이 높아진다는 연구도 있으니 국민들이 운동을 많이 하면 국가 전체의 생산성 증가로도 이어질 수 있을지 모른다.


내가 자라나던 시절 한국은 하드웨어/소프트웨어 적으로 많은 부분이 부족했기에 아무래도 우선순위라는 것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눈에 바로 보이지 않는 부분은 간과되다 보니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지금은 과거에 비해 좀 더 여유가 있으니 앞으로는 교육 시스템이 예체능 특히 생활 체육에 좀 더 강조점을 두는 쪽으로 바뀌길 희망해 본다. '체력은 국력'이라는 말은 그저 허투루 넘길 말이 아닌 것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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